사람을 연결하는 사소함... 기억의 문을 열고 안의 넓은 방 탐험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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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관에서 '내 인생 풀면 책 한 권'이라는 이름으로 어르신들과 글쓰기 수업을 합니다. 수업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어요. <기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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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풀면 책 한 권' 수업에 집중하는 어르신
ⓒ 최은영
사소한 자기소개를 해보기로 했다. 보통 시니어 글쓰기 반에서 자기소개라고 하면 몇 년생이고, 어디 살고, 자식은 뭐하고 손주는 몇 살이고 식으로 흐른다. 이번에는 기존의 소개는 다 빼고 '사소한' 소개를 해보기로 했다. 그냥 '사소한'이라고 하면 감이 안 올 수 있으니 강사인 내가 먼저 했다.
"저녁 7시 이후로 안 먹습니다. 집에서 색종이 가위로 머리 기장을 다듬어요. 미용실 안 간 지 8년째입니다. 아침에 90프로의 확률로 화장실에 성공합니다."
마지막 말에 다들 웃음이 터졌고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다. 내 의도가 제대로 전달된 거 같다. 5분 후에 발표하겠다고 하니 다들 손이 바빠진다. 그중 이번 학기에 처음 오신 분이 눈에 띄게 종이를 금방 채우길래 읽어달라고 했다.
기억에 남는 자기소개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퀴즈를 풉니다. 매일 하루 일과가 2~3개는 꼭 있습니다."
'몇 살이고 어디 사는 누구입니다'라고 했으면 다음 주까지 기억 못하겠지만 '새벽 4시에 퀴즈 푸는 사람'은 아마 학기 끝날 때까지 기억할 거라고, 이게 진짜 자기소개 아니겠냐는 말을 내가 덧붙였다. 은퇴한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매일 일과가 있다는 것 또한 자랑할 일이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발표자 얼굴에 만족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다음 발표자의 사소함도 사소함으로 끝날 수 없었다.
"손주 동화책 읽어주기를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읽다 보면 내가 더 재밌어서 그렇습니다. 잠이 안 올 때면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다 보면 스르르 잠이 들어요."
이 사소함으로 이분의 다음 주 글쓰기 소재가 나왔다. '내가 더 좋아한 손주 동화책'이다. 잠 안 올 때 노래를 부르는 것도 흔치 않다며 다들 신기해했다. 동요를 조용히 부르고 있으면 그 편안함으로 잠이 스르르 든다고 했다. 나는 이만큼 기억에 남는 자기소개가 없을 거라고 또 칭찬했다.
'머리만 대면 잠들 수 있기에 장거리 비행도, 여행지의 낯선 잠자리도 별 부담이 없다'는 자기소개도 있었다. 나이 들수록 수면의 질이 삶의 질과 직결되기에 이 또한 부러움을 받는 자기소개가 됐다. '서울시 건강장려 앱 손목닥터 포인트를 매일 채워서 손주 간식을 사주는 게 재미'라는 어르신도 있었다. 70대는 하루 5000보를 채우면 포인트 100원씩 주고 그게 연속 5일 쌓이면 1000원을 더 준다고 한다. 이 어르신 닉네임은 그날부터 '손목닥터'가 되었다.
사소함의 위대함
사소한 것들은 사람을 연결시켜준다. "저는 서울 출신입니다"라는 말에는 공감이 생기기 어렵지만 "저는 밥 먹고 꼭 10분은 누워있어야 합니다"라는 말에는 절반이 고개를 끄덕인다.
거창한 이야기는 그 사람을 소개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엄마로서, 직장인으로서, 누구의 아내로서의 그 사람의 '역할'을 소개한다. 사소한 이야기는 다르다. 역할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역할은 명함에 남고, 사소함은 기억에 남는다. 역할은 관계를 설명하지만 사소함은 존재를 드러낸다. 내가 수업에서 하고 싶은 건 그 드러나는 존재였다.
시니어 반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자식과 손주에 집중된 자기소개를 하다 보면 그런 자식이나 손주가 없는 사람에게는 소외감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한 '사소한' 자기소개는 우열이 없다. 그래서 부담 없고 그래서 웃을 수 있다. 사소함은 비교를 멈추게 하고 사람을 같은 자리로 불러 앉힌다.
나이가 들수록 역할은 하나씩 내려놓게 된다. 누군가의 직장 동료였던 자리, 누군가의 부하직원이었던 자리, 심지어 누군가의 현역 부모였던 자리도 조금씩 옅어진다. 반대로 사소한 습관들은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역할이 빠진 자리에 비로소 그 사람 자체가 남는다. 그리고 그 사소함이 쌓이면 어느 순간 '손목닥터' 같은 별명이 된다. 이름은 부모가 지어주지만 별명은 내가 살아온 방식이 짓는다. 사소한 자기소개가 결국 가장 정직한 이름표인 셈이다.
이날의 사소한 자기소개를 다음 주 글감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사소한 것은 기억의 문이다. 작은 문이지만 열면 안에 아주 넓은 방이 있다. 글쓰기는 그 방을 탐험하는 일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이 사소함은 이곳에서 쓸 글의 씨앗이 될 거다. 작아 보이지만 씨앗은 원래 작으니까 괜찮다. 씨앗에서 시작된 사소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때 자기소개는 진짜 자기 이야기가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개인sns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