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식의 역사 이야기] 문종의 죽음과 단종의 즉위 이후 옥좌를 넘보다
역사에 남다른 애착을 가진 '히스토리텔러'입니다. 국내와 해외의 주요 역사 이야기를 재미있게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기자말>
擊鼓催人命 북소리 둥둥 울려 목숨 재촉해
回頭日欲斜 고개 돌려 바라보니 해는 기울어
黃天無一店 황천 길엔 주막 한 곳 없다니
今夜宿誰家 이 밤을 뉘 집에서 묵어갈고
- 성삼문 '절명시' 中
신생국가 조선은 세종대왕 대에 이르러 마침내 반석 위에 올라섰다. 정치, 경제, 문화, 과학, 학문 등 다방면에서 눈에 띄는 발전이 있었다. 건국 초 왕자의 난과 조사의의 난 등 숱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비로소 장거리를 뛸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태평성대는 세종 이후에도 능력과 정통성이 있는 후계자들에 의해 변함없이 지속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감히 왕위를 넘봐서는 안 됐던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세조)이 전면에 등장,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키며 정국에 피바람을 몰고 왔다.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의해 김종서, 황보인 등 선왕의 충신들이 대거 척살됐고, 친동생인 안평대군도 죽임을 당했다. 이후 수양대군은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기까지 했다.
▲ 수양대군
옥좌를 넘볼 수 없었던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찬탈했다.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 역할을 한 배우 이정재.
ⓒ 쇼박스
비록 왕위에 오르긴 했지만, 세조는 '정통성'이 거의 없다시피 한 군왕이었다. 그러다 보니 곳곳에서 저항이 일어났고, 세조는 이를 잔혹한 방법으로 탄압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사육신' 사건이다. 성리학적 명분론을 중시했던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유학자들은 세조를 충의를 저버린 역적으로 규정, 급기야 '단종 복위 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내부의 배신자로 인해 거사는 실패했고, 세조는 사육신을 포함한 수십 명의 충신들을 사지를 찢는 방법까지 동원해 죽였다. 정통성이 없는 왕은 이런 잔혹한 방법을 통해야만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세조는 당대에는 힘으로 승리했을지 모르지만, 역사 속에서는 패배했다. 그는 조카와 충신들을 죽여가며 적장손 왕위 계승 등 조선의 유교적 헌정질서를 파괴했다. 특권을 갖는 '공신' 세력을 양산해 후대에 왕권 약화 및 당파 싸움을 초래하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군왕으로서의 직무 수행에 있어선 분명 잘 한 부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앞서 서술한 심각한 행위들이 그 모든 것들을 묻어버렸다. 반면 사육신 등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충신들은 당대에는 패배했지만, 역사 속에서는 승리했다. 세조가 키운 공신들이 판을 쳤던 조선 초기를 벗어나 조선 중후기부터 사육신 등과 결을 같이 하는 '사림'(士林)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이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졌다.
이후 현재에 이르러선 '충절의 화신'으로 규정됐다. 결국 후대의 사람들은 업적이 아닌 올바른 도리인 '정의'에 입각해 세조와 사육신, 단종 그리고 그 시대상을 평가한 것이다. 계유정난에서부터 사육신 사건, 단종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헌정질서 파괴 사건 전말을 되돌아봤다.
수양대군과 넘보기 힘든 옥좌
수양대군은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종의 아들들이 대체로 그렇듯 수양대군 역시 재능이 있는 인물이었다. 특히 무인적인 기질이 뛰어났다. 신체가 건장했고 완력도 강해 탄력이 센 활을 능숙하게 다뤘다고 한다. 반면 친동생인 안평대군은 학문과 예술에 뛰어났다.
세종은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을 정사에서 완전히 배제시키지 않고 어느 정도 역할을 맡겼었기 때문에, 이들은 적지 않은 정치적 기반도 갖추고 있었다. 이를 통해 수양대군은 일찍이 왕위에 대한 야심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수양대군은 쉽사리 왕위를 넘볼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무엇보다 친형이자 적장자인 문종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에 수양대군은 상대적으로 가려진 존재였다. 문종은 어릴 때부터 태종 이방원과 신하들을 놀라게 할 만큼 총명했고, 시간이 갈수록 성군적 자질이 다분한 군왕으로 성장해 나갔다.
특히 세종 치세 때 측우기와 화차(이동식 대포) 등 기발한 발명품들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했으며, 세종의 치세 마지막 7년은 사실상 문종이 혼자서 국정을 잘 돌봤다. 외모도 매우 출중해 문종을 본 명나라 사신은 "이 나라는 산천이 아름답기 때문에 인물도 이렇게 아름다운가"라며 감탄하기까지 했다. 넘치는 자신감을 갖고 있던 문종은 스스로를 '제갈공명'에 비유했다.
그러나 문종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건강이 좋지 못했던 것이다. 세종 말기 때 과도한 업무와 어머니, 아버지의 죽음에 따른 연이은 3년상으로 병세가 급격히 악화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따라 즉위 2년밖에 안 된 1452년 5월에 문종은 승하하게 된다(일각에서는 수양대군이 전순의라는 어의를 앞세워 문종을 독살했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된다).
성군으로 칭송을 받았던 아버지에 버금가는, 아니 어쩌면 아버지를 능가할 수도 있었던 전도유망한 왕이 죽자 조정의 신하들과 백성들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실록은 "임금이 승하하자 이를 슬퍼하는 것이 선왕(세종) 때보다 더하였다"라고 전하고 있다.
문종의 뒤를 이어 아들인 단종이 즉위했지만, 나이가 13세에 불과했고 정치적 뒷받침도 부실했다. 보통 어린 임금이 즉위하면 가장 서열이 높은 대왕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지만, 당시 단종 곁에는 수렴청정을 할 대비도 없었다.
문종의 죽음과 단종의 즉위는 야심이 있는 수양대군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다만 수양대군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력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만큼, 여전히 수양대군에게 옥좌는 요원해 보였다. 대표적인 세력은 '4군 6진' 개척으로 유명한 좌의정 김종서, 영의정 황보인, 우의정 정분 등이었다.
이들은 문종에게 "단종을 잘 보필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고명대신들이었다. 단종에게 위협이 될 만한 세력은 사실상 수양대군이 유일했기 때문에 고명대신파는 수양대군을 경계했다. 아울러 안평대군 등도 수양대군을 경계했다. 추후에 고명대신파와 안평대군은 수양대군을 의식해 손을 잡는 모습도 보인다. 단종도 잠재적 대권주자가 될 수 있는 수양대군보단 아버지 문종이 신뢰했던 최측근들인 고명대신파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다 보니 부작용도 있었다. 고명대신파가 인사 정책 등에서 '월권'으로 비칠 수 있는 행동도 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황표정사'(黃標政事)로, 의정부 대신들이 낙점한 사람의 이름에 누런 종이쪽지(황표)를 붙이면 임금이 그대로 임명하는 것이었다. 이는 추후 수양대군이 정변을 일으키는 데에 있어 중요한 명분이 된다.
거사 움직임
극히 어려운 상황 속에서 수양대군은 무엇을 했을까. 그는 굴하지 않고 뜻을 함께 할 동지들을 만들어나갔다. 다분히 왕위 및 거사를 의식한 행동이었다. 단종 즉위 후 2개월이 지난 어느 날, 수양대군은 자신의 집에서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사헌부 감찰을 지냈던 권람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수양대군과 권람은 정국 현황 및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거침없이 논의했다.
수양대군과 가까워진 권람은 범상치 않은 한명회도 소개해줬다. 한명회는 추후 계유정난과 세조 치세의 설계자가 된다. 또한 정치깡패이자 연쇄살인마인 홍윤성도 수양대군 밑에 들어왔다. 수양대군은 세력 규합과 더불어 본인에게 불리해질 수 있는 정책들을 대놓고 반대하는 모습도 보였다. 다분히 수양대군을 겨냥해 김종서 등이 추진한 '분경(奔競) 금지'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분경은 벼슬을 얻기 위해 권력 있는 사람들을 부지런히 찾아다니는 엽관 운동을 말한다.
당시 대군 등 권세가들의 주변에는 인사청탁을 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렸다. 이는 자연스레 '세력화'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분경을 금지하면 이의 가능성이 원천 차단돼 힘을 잃을 수도 있는 만큼, 수양대군은 대놓고 반대했다. 결국 그의 의도대로 분경 금지건은 철회됐다.
단순 야심을 넘어 왕권을 향한 수양대군의 '거사' 움직임이 본격화한 것은 1453년 4월부터다. 이는 수양대군이 단종의 즉위를 알리는 '고명사은사'(誥命謝恩使)로 명나라를 갔다 온 직후다. 수양대군이 고명사은사로 가기 전 권람 등은 이를 완강하게 반대했다. 먼 길을 가서 자리를 비운 사이 김종서 등이 수양대군파에 대한 제거를 획책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수양대군 측근들이 느꼈던 위협은 막연한 것이 아닌 실제적인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수양대군은 껄껄 웃었고, "김종서 등은 그럴 만한 호걸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안심시켰다. 그런 다음 곧장 명나라로 가는 길에 올랐다. 실제로 수양대군이 부재할 때 고명대신파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이때 수양대군이 주변의 우려를 물리치고 자발적으로 고명사은사로 간 것은 고도의 계산이 깔려있는 정치적 술수로 읽힌다. 이를 통해 본인이 왕의 충실한 신하요, 결코 왕권에 욕심이 없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내 보임으로써, 정적들의 경계를 완화시키려 한 것으로 분석된다(이는 결과적으로 성공했다).
더욱이 명나라에 가서 본인이 조선의 유력한 왕자임을 알리며 현지 인맥을 구축했고, 함께 동행했던 전도유망한 집현전 학사 출신인 신숙주를 얻었다. 아마도 명나라에서 거사 결심을 굳히고 구체적인 거사 계획을 세웠을 것으로 보이는 수양대군은 귀국하자마자 한편으로는 고명대신파의 월권행위에 불만을 품고 있던 집현전 출신 문인들을 끌어들였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홍달손, 양정 등 무사들을 적극 양성해 나갔다. 이에 따라 거사 직전 수양대군 휘하에는 무시 못할 정도의 세력이 형성돼 있었다.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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