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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논리에 평화가 짓밟혀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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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문학이 말을 건넬 때] 평화, 우리가 지키기 위해 해야 할 일

2026년 3월 27-29일간 DMZ와 파주 인근에서 열릴 ‘DMZ세계문학페스타 2026’은 전쟁과 분단, 혐오와 차별, 민주주의의 위기 속에서 문학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모색하는 자리입니다. 연속 기고 '다시 문학이 말을 건넬 때'는 분단과 경계, 평화, 민주주의, 디아스포라, 마이너리티라는 다섯 가지 의제를 중심으로, 세계의 문학이 경유해 온 고통의 역사와 그 너머의 가능성을 시민들과 함께 나누어보고자 기획되었습니다. <기자말>

경기도 파주시 접경지역에서 육군 장병이 임진강변 철책을 따라 이동하고 있다. 자료사진.

ⓒ 연합뉴스

1983년 9월 1일, 소련 전투기가 민간 여객기인 대한항공 007편을 항로 이탈을 이유로 격추하여 269명 탑승자 전원이 목숨을 잃는 참극이 벌어졌다. 다음 달인 10월 9일에는 북한이 버마 순방길의 당시 대통령 전두환을 노리고 '아웅산 테러'를 저질러 장관, 청와대 수석 등 다수의 정부 고위 관료가 사망했다. 국내에서는 군사정권의 폭압적 통치에 맞선 민주 세력의 저항이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이처럼 정치적·군사적 긴장이 높던 때에 군에 입대하여 훈련받던 나는 12월에 4주 동안 철원 지역 철책선에서 근무했다. 일출 직전 한 시간의 경계 근무가 적 침투에 취약하다는 명분으로 밤새 교대 근무하며 고생하던 병사들이 모두 일어나 초소에 투입되는 게 일상이었다. 기억이 흐릿하지만 이걸 우리는 '합동근무'라고 했고 북은 '전원감시'라고 한다고 들었다.

200킬로미터 훌쩍 넘는 긴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의 무장한 젊은이들이 새벽에 서로 마주 보고 감시하며 추위에 덜덜 떠는 모습은 차라리 코미디였다. 한겨울 매서운 북풍이 우리 얼굴을 때리지만 인민군은 그걸 등지고 견디는 것이니 우리가 더 손해네, 하는 냉소 섞인 엉뚱한 생각이나 하며 시간을 죽이곤 했다.

그 짧은 기간에도 이웃 부대에서는 병사들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이어졌고, 부하들에게 발길질 일삼는 소대장을 견디다 못한 선임하사는 그를 폭행하고 영창에 끌려가는 일도 있었다. 대학 후배 하나가 정치적 성향이 없는 어느 '온순한' 동아리의 회장이었지만 동아리연합회 활동이 시위와 연관되었다는 이유로 난데없이 강제 징집을 당해 최전방에 와 있다가 차창을 온통 검게 칠한 보안사 지프가 나타나면 따라가 조사받아야 했다.

짧은 비무장지대(DMZ)의 경험은 그 후 40년 넘는 세월이 지나는 가운데 뇌리에서 사라졌지만, 동시에 내 삶 밑바닥에 언제나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었다. 당장 내란수괴 윤석열이 북한의 위협과 도발을 친위 쿠데타의 명분으로 삼으려고 벌인 짓들은 뚜렷한 정황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만약 무인기 평양 침투 등에 북이 가시적인 보복 조치에 나섰다면 불법 비상계엄은 성공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우리는 여전히 1953년 정전협정의 틀에 기초한 분단체제의 휘발성 높은 불안정에 얽매여 있으며, 우리의 삶은 여전히 평화와 거리가 멀다.

평화는 다른 어떤 가치보다 앞서는 보편적인 가치이며, 오늘의 내란 진압 과정이 잘 보여주듯이 우리가 누려야 할 최소한의 인권, 안정적인 민주 질서, 모두의 인간답고 행복한 삶과 직결된 소중하고 구체적인 가치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평상시에는 평화의 소중함을 잊고 살지만, 비상한 시국이 닥치면 평화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절절히 깨닫게 된다.

그렇지만 평화운동이나 평화주의자라는 말을 입에 올리면 문제는 복잡해지고 사람마다 생각이 달라지는 것 또한 현실이다. 나 스스로도 자신을 평화주의자에 못 미치는 사람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지금처럼 어지러운 세계 질서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안위를 위해서는 강력한 상비군 보유가 필수라고 믿기 때문이며, 그 논리적 귀결로서 군의 전력 유지를 위한 튼튼한 '방위산업'(군수산업의 완곡어법)의 필요성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끊기고 만 길 앞에서

2021년 10월 18일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에서 열린 '서울 국제항공우주 및 방위산업 전시회 2021' 프레스데이 행사에 소총이 달린 드론이 전시돼 있다.

ⓒ 연합뉴스

그런데 우리가 자본주의 체제에 살고 있는 한 군수산업은 자본의 논리를 따르게 마련이다. 군수산업은 수요 공급의 법칙 등 일반 경제의 논리에 따르지 않고 국가 정책에 따라 국민 세금으로 유지하는 특수한 영역이지만, 잘 알려져 있듯이 비밀주의 등이 작동하는 와중에 비리와 부패가 독버섯처럼 자라기 십상이다. 나아가 군수산업의 생산물 품질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해외에 수출할 길이 열리면 상황이 크게 달라진다. 사람을 죽이는 물건을 팔아 큰돈을 벌 판로가 생기는 것이다.

국내 언론이나 영향력이 큰 인물들 입에서 국산 자주포, 전차, 훈련기 등의 우수한 경쟁력이 가져온 수출 성과에 대한 찬사가 나올 때면 나는 무척 불편해진다. 정당한 자위권을 위한 노력과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평화의 대의 사이에 균열이 생기면서 후자를 훼손할 위험이 커지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 시절 155밀리 포탄 33만 발을 우크라이나에 우회 지원했다는 문서가 유출되면서 논란이 된 바 있다. 이 섣부른 행동으로 우리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서 러시아의 협력을 얻기 힘들어지고 말았으며, 북한의 우크라이나 파병 명분을 제공한 면도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 경제적 동기 아닌 정치적 동기로 행해진 일이지만, 군수산업에서 두 가지 동기를 엄밀히 구별하기도 어려울뿐더러 그 산업의 이윤을 위해 무기와 탄약이 적절한 감시와 통제 없이 국외로 팔려 나간다면 그 후과가 무엇이 될지 알 수 없는 두려운 일이다.

국산 무기의 수출을 엄격히 민주적으로 통제할 필요가 있지만, 이에 대한 공론화가 본격화한다면 '방위산업'을 포함한 경제의 중요성을 외면한다는 이유로 군수산업 통제를 관념적 평화주의라며 배척하고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군수산업의 민주적 통제는 내실 있는 민주주의를 위해 필수적이다.

패권국가인 미국과 우리를 단순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특히 한국전쟁을 계기로) 군산복합체를 민주적으로 통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끌려다니게 됨으로써 '안보국가'가 되고 말았고, 오늘의 미국이 적나라하게 드러내듯이 국내의 민주 질서마저 파괴하게 되었다는 역사적 교훈을 명심해야 한다. 적어도 이 점에서 나는 평화주의자라고 말해 좋다.

올해는 우리 현대시의 기점이라고 해도 좋을 만해의 <님의 침묵> 발간 100주년이다. 그가 시집을 탈고한 설악산 오세암 등 만해의 행적을 추적하다 보면 우리는 곧바로 DMZ를 맞닥뜨리게 된다. 우리는 만해가 수행 중 설악산, 금강산 일대에 남긴 뜻깊은 길을 온전히 되밟을 수 없는 것이다. 끊기고 만 길 앞에서 우리는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이 얼마나 절실한지 새삼 깨닫는다.

국제 사회에서 이미 '기후 악당' 소리를 듣는 우리가 가자 전쟁으로 대량 학살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이스라엘과 비슷하게 살상 무기를 거래하는 '무기 악당'까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포와 총을 남김없이 녹여 쟁기와 보습을 만드는 일은 당분간 어렵지만, 우리 사회를 위험에 빠뜨리는 군수산업의 융성을 팔짱 끼고 방관하면 곤란하다. 고 김남주 시인의 시 제목처럼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김명환 익천문화재단 길동무 문학학교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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