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식의 역사 이야기] 계유정난과 세조의 즉위
역사에 남다른 애착을 가진 '히스토리텔러'입니다. 국내와 해외의 주요 역사 이야기를 재미있게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기자말>
(이전 기사 : 세종 이후 태평성대를 깬 둘째 아들 수양대군에서 이어집니다.)
1453년 10월 10일 밤, 수양대군은 마침내 거사를 결행하기로 했다. 이 날 거사를 치르기로 한 가장 큰 이유는 단종이 궁궐을 나와 누나인 경혜공주의 사저에 머무를 예정이었던 만큼, 평소 대비 궁궐의 경비 상태가 느슨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선 수양대군은 일단의 군사들에게 은밀히 경복궁을 장악하라고 지시했다. 본인은 삼정승 가운데 가장 뛰어난 김종서를 직접 찾아가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우여곡절이 있었다. 사전에 김종서의 집을 염탐하러 갔던 홍달손이 "집 근처에 무사들이 모여 있는 것 같다"라고 보고함에 따라 일각에서 거사를 미루자는 의견이 나왔다.
또한 수양대군이 무인들 앞에서 거사의 당위성을 설명할 때 적지 않은 이들이 역모라고 판단, 이탈자들이 나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수양대군과 한명회는 그대로 밀어붙이기로 결정하면서 예정대로 거사가 진행됐다. 일단의 군사들은 경복궁으로 향했고, 수양대군은 양정, 임어을운 등을 대동한 채 돈의문 밖 김종서의 집으로 향했다.
한밤의 쿠데타
수양은 김종서의 집 앞에서 김종서와 그의 아들 김승규를 대면했다. 거사는 의외로 쉽게 성공했다. 수양이 역모 사건이 있다면서 편지를 건네자, 김종서가 뒤돌아서서 달빛에 편지를 비춰봤다. 어두워서 편지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승규는 수양이 부탁한 사모를 가지러 가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바로 그 때, 임어을운이 품 안에서 철퇴를 빼내 김종서에게 달려들었다. 임어을운의 철퇴는 김종서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다. '백두산 호랑이' 김종서는 그대로 쓰러졌다. 뒤늦게 돌아온 김승규는 양정의 칼날에 베어 쓰러졌다.
이후 수양과 그 무리들은 곧바로 경혜공주 저택을 비롯한 도성 4대 문과 주요 군 시설, 요충지들을 확보한 뒤 일단의 군사들이 장악하고 있던 경복궁으로 쳐들어갔다. 수양은 궁궐에서 동부승지 최항을 만났고, 그에게 역모가 발생했으니 단종을 빨리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모든 조정 신료들의 명단이 나와있는 자료도 요구했다. 최항은 수양을 믿지 못해 명부 제공을 꺼렸지만, 계속된 압박에 명부를 넘겨주고 말았다. 이 명부는 신료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살생부'(殺生簿)가 됐다. 수양은 단종에게 김종서 등이 반란을 일으켜 안평대군을 왕으로 만들려 했기 때문에, 김종서 등을 척살했다고 밝혔다. 그런 다음 단종의 명을 빌려 모든 조정 신료들을 궁궐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신료들은 영문도 모른 채 궁궐 안으로 차례차례 들어왔다. 이들을 맞이한 건 단종이 아닌 한명회와 일단의 군사들이었다. 한명회는 살생부를 들고 있었고, 이에 기반해 입궐하는 신료들을 면밀히 확인했다. 이 직후 '살조'(殺條)로 분류된 신료들을 처형하라고 명했다. 영의정 황보인, 병조판서 조극관, 이조판서 민신, 우찬성 이양 등이 단번에 죽임을 당했다. 한밤 중의 쿠데타인 '계유정난'이 극적으로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 영화 <관상>에서의 수양대군.
수양은 한밤 중의 쿠데타인 '계유정난'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 쇼박스
세조의 즉위
순식간에 세상이 바뀌었다. 기존 세력이 사라진 자리에 수양과 그 무리들이 새롭게 올라섰다. 수양은 다양한 요직을 겸하며 권력을 완벽히 장악했다. 영의정부사·영집현전사·영경연사·영춘추관사·영서운관사·겸판이병조·내외병마도통사 등이다. 수양을 도왔던 한명회, 권람, 정인지, 양정 등 43인은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책봉됐다. 이들은 온갖 특권을 누리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수양대군은 집현전에게는 자신을 찬양하는 교서까지 짓게 했다.
끔찍한 피바람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안평대군은 김종서, 황보인 등과 한패가 돼 왕위를 찬탈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강화도, 교동도에 유배된 후 사사됐다. 조극관의 동생인 조수량, 충청감사 안완경, 정분 등 수양대군 반대파들도 귀양을 간 후 교살됐다. 수양대군은 함길도 도절제사였던 이징옥도 처단했다. 무력이 뛰어났던 이징옥은 김종서의 심복이자 안평대군과도 친한 사이였다.
수양대군은 다른 누구보다 이징옥을 두려워했다. 그는 이징옥을 파면하고 박호문을 후임으로 임명해 함길도로 보냈다. 박호문이 이징옥에게 함길도 도절제사를 그만두고 중앙으로 오라는 어명을 전하자 그는 매우 의아해했다. 과거 김종서가 도성에 변고가 있기 전에는 결코 부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징옥은 구체적인 연유를 캐물었다. 그러자 박호문이 계유정난을 발설하고 말았다. 이징옥은 당황했지만, 일단 박호문에게 자리를 인계하고 호위병력을 거느린 채 상경길에 올랐다. 그런데 남쪽으로 60리 정도 가던 중에 이징옥은 불길함을 인지하고 함길도로 회군했다. 그는 박호문을 화살로 쏴 죽인 후 북쪽으로 나아가 종성에서 스스로 '대금황제'라 칭했다. '이징옥의 난'이었다. 이징옥은 오국성을 도읍으로 정했고, 여진족 및 변방 각 고을의 후원을 얻어 세력을 키우려 했다. 당시 여진족 사이에서는 이징옥에 대한 명성이 자자했다.
이징옥의 난은 조선왕조에 대한 최초의 대규모 반란, 지역 주민에 대한 중앙 정부의 차별 유발, 황제라 칭하고 여진족과의 연합을 도모하려 했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을 받을 만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다. 동지였던 종성부사 정종, 호군 이행검 등이 배신해 이징옥과 그 아들을 살해한 것이다. 훗날 채제공은 '번암집'에서 이징옥이 황제를 꿈꿔서가 아닌 단종 복위를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에 따라 이징옥을 반역자가 아닌 충신으로 규정했다.
수양대군과 그 일파들은 단종 3년인 1455년부터 본격적으로 대권가도를 밟아나간다. 단종이 장성해가고 있었기 때문에 더 지체했다간 곤란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수양대군 등은 단종을 노골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했다. 압박의 수단은 단종과 가까운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단종을 매우 아꼈던 수양대군의 동생 금성대군, 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의 친오빠 권자신, 어릴 때부터 단종을 모셨던 궁녀들을 석연치 않은 이유를 들어 유배 보내거나 죽였다. 단종이 왕위에 머물러 있는 이상 이 같은 조치들은 계속될 것이었다. 단종은 이들의 고통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됐다고 생각하며 괴로워했다.
조정의 그 누구도 수양대군 등의 행동에 반기를 못 들고 그저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고독한 단종은 왕비 송씨와 함께 앞날에 대해 논의했다. 수양대군의 압박을 뚫고 왕위를 지킬 방법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단종은 내시 전균을 불러 수양대군에게 '선위'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때 동부승지 성삼문이 임금의 도장인 대보(大寶)를 들고 선위 자리에 갔다. 그는 결코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수양대군은 단종이 경회루에서 대보를 전달하면서 선위 하겠다고 했을 때, 엎드려 울면서 사양하는 모습을 보였다. 진심은 아니었고 그저 보여주기였다. 단종이 직접 손으로 대보를 잡아 수양대군에게 전하니 그제야 수양대군은 이를 받았다. 단종은 선위 하는 과정에서 "어찌 과인만이 세종대왕의 자손이 되겠는가. 숙부(수양대군)도 세종대왕의 자손이므로 왕위를 이을 권한이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장면을 본 성삼문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고, 수양대군은 고개를 들어 성삼문을 노려봤다고 전해진다. 이후 경복궁 근정전에서 세조의 즉위식이 열렸다. 단종은 24세나 많은 숙부의 상왕이 돼 수강궁(창경궁의 전신)에 머물게 됐다.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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