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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테논 신전급" 캐나다 건축가가 극찬한 서울의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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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물유적] 500년 조선 역사의 시작과 끝, 종묘

종묘의 중심 건물 정전. 1985년 국보로 지정됐다

ⓒ 국가유산청

인류문명과 함께 발생한 종교와 그 공동체들은 강력한 사회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세상 곳곳에 그들이 경배하는 신을 위한 건축물 '신전(神殿)'을 남겼다. 기독교의 성당과 교회, 불교의 절, 유교 사당, 힌두교 사원, 이슬람교의 모스크, 유대교 회당처럼 이름은 달랐지만 신전은 종교와 정치·문화의 중심지로 자리했다.

정치와 종교가 하나이던 정교일치(政敎一致) 시대. 신전은 사람들을 결집시키고 종교적 의례를 통해 통치의 정당성과 권위를 높였다.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이태리 로마의 판테온, 중국 베이징의 태묘(太廟)처럼 세계 모든 민족들은 다양하고 고유한 형태의 신전을 지었다. 선사시대부터 존재했던 신전은 지금까지도 인류문화유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동양의 파르테논 신전 '종묘(宗廟)'

"건축으로 이렇게 고요하면서 경건한 공간을 만든 건 기적에 가깝다. 이같이 장엄한 공간은 세계 어디서도 찾기 힘들다.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곳을 굳이 말하라면 파르테논 신전 정도일까? 한국 사람들은 이런 건물이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자기만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경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대체 누가 우리나라 어떤 건축물을 파르테논 신전과 비교하며 이토록 극찬했을까. 캐나다 출신 미국인으로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은 20세기 최고의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 1929~2025)가 한국의 종묘를 방문하고 남긴 소감이다. 프랭크 게리뿐만 아니다. 일본 현대 건축의 거장 시라이 세이이치(白井晟一 1905~1983)도 "서양에 파르테논 신전이 있다면 동양에는 종묘가 있다"라며 종묘의 가치를 극찬했다.

고대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과 조선의 종묘. 두 건축물 사이에는 2천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의 강이 흐르고 있다. 또한 석재와 목재라는 재료의 본질적 차이, 동양과 서양이라는 지리적 경계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서양 신전의 대표 격인 파르테논 신전에 비견되며 세계적 건축가들에게 깊은 울림과 감명을 주는 종묘는 어떤 곳일까.

1392년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1394년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면서 가장 중요하고 시급하게 추진했던 일 중의 하나는 새 종묘와 사직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종묘와 사직은 유교국가에서 갖춰야 할 사상이 담긴 핵심 시설이었기 때문이었다.

마루(으뜸) 종(宗) 사당 묘(廟). 말 그대로 종묘는 국가의 으뜸 사당이다. 조선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유교 사당으로 일종의 '신전(神殿)'이다. 신주란 죽은 사람의 영혼이 깃든다고 믿었던 나무패를 말한다. 유교 사상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혼(魂)'과 '백(魄)'으로 나뉘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에 묻힌다고 믿었다. 그래서 왕이나 왕비가 승하하면 육신은 왕릉에 묻고 영혼은 신주에 담아 종묘에 모셨다.

땅을 주관한 토지의 신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 1963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됐다

ⓒ 국가유산청

사직(社稷)은 땅을 주관한 토지의 신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농업을 국가의 근본으로 여겼던 조선에서 땅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며 풍년을 기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이처럼 종묘와 사직은 국가 최고의 제례공간으로 법궁인 경복궁보다 더 중요한 시설로 여겼다. 역사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전하! 종묘사직을 보존하소서"라는 대사에서 알 수 있듯이 종묘와 사직은 조선 왕실의 정통성과 근본을 상징하는 가장 신성한 공간이었다.

그렇기에 종묘와 사직은 매우 엄격한 조영(造營) 원리에 따라 조성됐다. 고대 중국의 예법서인 <주례(周禮)>에 나오는 '좌묘우사(左廟右社)' 원칙을 따랐다. 즉 "나라를 세우면 도성의 궁문 밖 왼쪽에는 종묘를 오른쪽에는 사직을 세워야 한다"라는 원리다. 임금이 경복궁 근정전에 좌정했을 때 왼쪽에 종묘를 오른쪽에 사직단을 세웠다. 지금 서울 종로구에 있는 종묘와 사직단은 이 원리를 따른 것이다.

국보로 지정된 종묘의 중심 '정전(正殿)'

종묘 정전

ⓒ 국가유산청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한 지 2년째 되는 1395년 9월 완공된 종묘에는 500년 조선왕조의 흥망성쇠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종묘가 세워지고, 불타고, 다시 지어지고, 부족한 공간을 채우기 위해 확장되는 과정은 조선 역사의 압축판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을 보려거든 종묘를 보라"라는 말이 있듯이 종묘에는 조선왕조의 정체성, 건축과 예술, 의례와 문화 등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창건 당시의 종묘는 대실 7칸, 좌우 익랑 각 2칸, 공신당 5칸 규모였다. 종묘가 완공되자 태조 이성계는 개경에 있던 4대 조인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의 신주를 정전으로 모셔왔다.

26년이 지난 1421년(세종 3년) 정전에 모실 신주 공간이 부족해지는 문제가 생겼다. 정전이 태조와 그의 4대조의 신위로 가득 찼기 때문이었다. 이에 세종은 정전의 북서쪽에 영녕전(永寧殿)이라는 별묘(別廟)를 신축했다. 같은 이유로 1546년(명종 원년)에 정전 좌우로 2칸씩 증축하여 11칸으로 확장됐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종묘에 주둔했던 왜군들의 방화로 종묘는 잿더미가 됐다.

종묘 정전의 신실

ⓒ 국가유산청

종묘 정전 내부 신단

ⓒ 국가유산청

이후 1608년(광해군 원년)에 정전 11칸, 영녕전 10칸으로 신축했다.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정작 종묘를 다시 복원한 광해군은 종묘에 입주하지 못했다. 연산군도 마찬가지다. 정전과 영녕전 어디에도 두 사람의 흔적은 없다. 폐위 됐다가 복권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치 영속되는 조선 왕조처럼 종묘는 계속 증축된다. 1726년(영조 2년)에 15칸으로, 1836년(헌종 2년)에 정전을 19칸, 영녕전을 16칸으로 증축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리 하여 종묘 정전은 길이가 무려 101m가 된다. 단일 건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목조 건물로 공간미학의 극대화를 보여준다. 종묘 정전은 1985년 국보로 지정됐다.

그렇다면 종묘의 중심 정전에는 어느 왕들이 모셔져 있을까. 우리가 아는 조선역대 왕들은 27명이다. 그중 광해군과 연산군을 제외하더라도 25명인데 신실은 19칸이다. 현재 정전에는 불천위(不遷位, 4대 봉사가 지난 뒤에도 사당에 영구히 모셔 두고 제사 지내는 신위)로 지정된 태조 이성계 등 15명을 포함하여 총 19명의 왕과 30명의 왕비가 모셔져 있다. 재직 중 비교적 공덕이 큰 왕과 왕비들이다.

보물로 지정된 종묘의 별전 '영녕전(永寧殿)'

종묘의 별전 영녕전. 1985년 보물로 지정됐다

ⓒ 국가유산청

정전의 북서쪽에는 정전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공간구성이 비슷한 건물이 있다. '왕실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는 '영녕전(永寧殿)'이다. 조선 왕조가 지속되면서 종묘 정전의 공간이 부족해지자 세종은 1421년에 별묘인 영녕전을 건립한다.

정전에 계속 모실 수 없는 태조의 4대조와 불천위로 정해지지 않은 왕과 사후에 왕으로 추대된 추존왕의 신위를 옮겨 모시기 위해서다. 현재 영녕전에는 태조의 4대 선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 비롯한 9명의 추존왕과 7명의 역대 왕을 포함하여 총 16명의 왕과 18명의 왕비가 모셔져 있다. 역대 왕들 중에서 재위 기간이 짧거나 비교적 업적이 많지 않은 왕들이다.

영녕전은 정전과 달리 가운데 4개의 신실을 옆에 달린 신실보다 높게 꾸미고 태조의 4대조를 모셨다. 서쪽 5번째 방부터 정종, 문종, 단종, 덕종, 예종, 16번째 마지막 신실에는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17세기 중기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영녕전은 제사를 드리는 곳이라는 목적에 맞게 구조와 장식·색 등이 단순하고 장중하게 지어졌다. 영녕전은 1985년 보물로 지정됐다.

종묘에는 역대 왕들 뿐만 아니라 그들을 도왔던 공신들의 위패를 배향한 공신당(功臣堂)이 있다

ⓒ 국가유산청

종묘에는 역대 왕들 뿐만 아니라 그들을 도왔던 공신들의 위패를 배향한 공신당(功臣堂)이 있다. 정전 맞은편 공신당에는 조선의 공신 83명의 신위가 봉안돼 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조선 건국의 설계자 정도전의 위패는 공신당에 없다.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에 의해 개국 1등 공신에 봉해졌으나 아들 태종 이방원과의 권력다툼에서 밀려나 역적으로 기록됐기 때문이다.

또 한 사람, 친일파의 대명사 을사오적 이완용이 일제강점기 때 배향공신이 됐다가 광복 후 퇴출됐다. 이처럼 공신당의 공신들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배향되기도 했고 파향 되기도 했다.

조선왕조 최고 사당에 특이하게 고려의 왕이 모셔져 있다. 고려 제31대 공민왕 신당이다. 일화에 따르면 종묘를 창건할 때 공민왕 영정이 바람에 날아와 경내에 떨어졌다. 조정 대신들의 장고 끝에 신당을 지어 영정을 모셨다고 한다. 사실상 고려의 마지막 왕 공민왕의 원혼을 달래려 한 것으로 해석한다. 신당에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가 한자리에 있는 영정과 준마도가 봉안되어 있다.

고려 공민왕 신당.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 국가유산청

공민왕 신당에 모셔진 공민왕과 그의 아내인 노국대장공주의 영정. 노국대장공주는 공민왕과 결혼한 원나라 공주다. 공주는 원나라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이 친원파들을 척결하는 반원(反元) 자주 개혁에 적극 동참했다

ⓒ 국가유산청

그 밖에도 유교사상과 관련된 일곱 신을 모신 칠사당, 왕이 머물면서 왕세자와 함께 제례를 준비하던 재궁, 제사 예물을 보관하는 향대청, 종묘를 관리하는 관원들이 업무를 보던 망묘루 등 여러 부속 건물들이 있다.

조선 정신문화의 집합체, 종묘는 1963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됐고 종묘제례악과 종묘제례는 1964년과 1975년 국가무형유산 목록에 올랐다. 1985년에는 정전과 영녕전이 각각 국보와 보물로 지정됐다.

유네스코는 1995년 종묘를 세계유산에 등재한 데 이어 2001년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을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한국의 종묘는 한 국가를 넘어 모든 인류가 추구하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 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지닌 문화유산이라고 세계가 인정한 것이다.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된 종묘제례악

ⓒ 국가유산청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된 종묘제례

ⓒ 국가유산청

18세기 독일의 미술사학자 빙켈만(1718~1768)은 고대 그리스 예술에 대해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Noble Simplicity and Quiet Grandeur)"이라 정의했다. 이는 우리나라 종묘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종묘와 그의 정의는 서로 닮아 있다.

영원히 이어질 것처럼 열 지어 서 있는 붉은 기둥, 화려하지 않은 단청, 절제된 맞배지붕, 허식 없이 드넓게 펼쳐진 월대는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한국의 종묘는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과 비견될 만한 요소가 충분하다.

종묘를 관리하는 관원들이 업무를 보던 망묘루

ⓒ 국가유산청

최근 종묘 앞 개발과 관련해 논쟁이 뜨겁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종묘 맞은편 142m 건물 신축계획이 "대법원의 적법 판단으로 추진 동력을 얻었다"라고 주장한다. 반면 국가유산청과 문화유산 관련 단체 들은 이로 인해 "종묘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가 훼손돼 세계유산 지정이 취소될 수 있는 행위"라며 걱정하고 있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서 한 국가의 품격은 역사와 문화유산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500년 조선 역사의 시작과 끝이 담겨있는 종묘는 주변 경관과 함께 영구히 보존해야 할 소중한 유산이다. 이를 온전히 지키는 것이야말로 우리 후손들의 책무이며 '역사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격월간 문화메거진 <대동문화>153호(2026년 3, 4월)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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