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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한복판에, 아픔으로 이식된 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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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순성⑤] 돈의문~서소문~숭례문

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기자말>

인왕산을 타고 온 성벽이, 여기서 끊겨 버렸다. 산을 내려 온 성벽의 관성으로 경교장에 든다. 하마터면 잊고 지날 뻔했다. 돈의문 터 아래이니, 분명 성 밖이다. 금광으로 거부가 된 친일파가, 치부를 가리고 죽음을 모면하려 백범 김구에게 거처로 내주었을까.

▲ 경교장

병원 안에 동그마니 내놓인 경교장. 표정이 주변과는 사뭇 다르다.

ⓒ 이영천

예스러운 파사드(Fasad, 정면)의 집이 번다한 병원에 갇혀 무척 퀭한 표정이다. 백범을 바라며 들끓었던 그 많던 애국청년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2층 유리창, 총탄이 뚫은 구멍만 선연하다.

돈의문 터가 마냥 허전하다. 문이 없어서가 아니다. 억지로 사라진 이유가 떠올라서다. 성곽이 헐린 도성이다. 방어를 포기했다기 보다, 다른 힘에 밀려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인 자리다. 이식된 근대는 그처럼 태풍보다 드셌다.

문은 자리를 고집할 수 없었고, 침탈의 파고는 빈자리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낯선 힘은 언제나 가장 느슨한 곳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법이다. 경교장도 그중 하나다. 길 건너 정동길에 들면 느슨한 틈을 파고든 힘의 흔적이 지천이다. 공간에는 종교와 학교, 병원을 앞세우며 밀려든 근대화가, 경교장 파사드 마냥 곳곳에 박혀있다.

▲ 돈의문 터

돈의문이 서 있었던 새문안로의 정동사거리. 문이 앉았던 언덕은, 지금보다는 더 높았을 것이다.

ⓒ 이영천

정동은 헐린 성벽의 흔적조차 더듬기 어려운 공간이다. 사라진 성벽이 섬처럼 고적하다. 갇힌 담장 안, 근대화라는 드센 파고가 이젠 고요로 머문다. 정적이 오히려 재빠른 현재에 맞서 저항하는 듯하다. 경운궁과 외국 공관들, 학교와 남은 교회. 시대는 지나갔어도, 공간은 아직도 긴장된 자세를 풀지 못했다.

인의예지 중 서대문은 의(義)다. 경복궁 영추문이 가을이듯, 돈의문도 그렇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한양도성을 돌다 보니, 본의 아니게 가을에서 여름 숭례문을 향해 걷는다. 계절을 거스를 재주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에도 계절을 붙인 지혜가 새삼스럽다. 그러면서 문득 '그대는 지금 생의 어느 계절을 걷고 있는가?'라며 묻는다.

성벽이 사라진 자리

새문안로에선 도무지 성곽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어떤 자취도 남아 있지 않다. 정동길로 접어들면 그러나 걷기엔 즐겁다. 근대 건축물이나 당시 이야기가 구석구석 서려 있어서다. 그랬어도 성벽 대신 온통 가두고 막은 담장 일색이라니.

▲ 한성교회 옹벽

성벽이 지났을 것으로 추정하는 漢城(한성)교회 옹벽. 교회는 옛 도성의 이름을 그대로 써 성안임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 이영천

정동길 초입, 연이은 건물군 뒤편의 한성중화기독교회 자리로 성곽이 지났다. 이어진 창덕여중 뒤쪽 담장에 희미하게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학교 담장 너머의 운동장이 옛 프랑스 공사관 자리다. 예스러운 공사관이 사라진 대신, 충정로에 제비처럼 유려하고 날렵한 멋진 대사관이 서 있다.

오로지 가톨릭을 위해 조선과 수교한 그들의 열망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처럼 당시 프랑스는 외교나 이익보다, 가톨릭이 우선이었다. 그렇다면 프랑스는 제국이 아니었단 말인가. 모호하다. 성벽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건 그 무엇도 아닌, 오래된 사진 속에 아름다운 공사관의 기억뿐이다.

성벽이 없다는 건 침입을 용인했다기보다, 작은 몸부림으로라도 맞섰다고 읽고 싶다. 조선은, 도성 중심이 아닌 이 좁은 서쪽 공간에서 가장 먼저 제국을 '맞아야 하는' 홍역을 치렀다. 방어선이 사라진 자리로 조약문서와 외교문서가 밀고 들어왔다. 성 돌이 사라진 자리를 붉은 도장이 찍힌 종이가 대신 채웠다.

등나무 길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성곽은 분명 그 경계로 지났다. 이화외고와 이화여고 사이다. 들어가 보기 어려운 학교 안 길이 평온해 보여, 여기 학생들만큼이나 어여뻐 보인다. 이화여고 교정엔 유관순의 이름 또한 뚜렷하다. 기념관은 물론 재학 당시 손수 빨래했다는 소담한 우물터도 남았단다.

▲ 심슨기념관(이화박물관)

예스러운 정동길 중간, 이화여고 출입구다. 보이지 않는 사진 오른편이 100주년 기념관이고, 사진 속 건물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심슨기념관'이다. 손탁 호텔이 이 부근에 있었다.

ⓒ 이영천

그가 교정 길을 숨 가쁘게 오르내렸을 때, 성곽은 남아 있었을까. 열사에 대한 기억은 모두의 유산으로 남았지만, 헐린 성벽은 어딜 가야 찾을 수 있을지. 성곽은 등나무 길을 따라 노천극장을 지나 러시아 대사관 뒷담으로 이어진다.

이식된 근대

이화여고 안으로 걷긴 어려우니, 빙 둘러 정동길로 돌아 나간다. 100주년 기념관이 담장 하나 사이로 친근하다. 그 옆자리가 손탁호텔 터다. 러시아 공사관을 설계한 사바틴이 이 호텔 설계에도 관여한다.

사바틴과 손탁은 분명 망해가는 조선을 똑똑히 목도 한 외국인들이다. 러시아 초대 공사 베베르와 같이 조선에 들어온 그녀는 우리에게 호텔을 남겼다. 구한말의 근대가 그녀의 이름과 함께 아직도 이곳에 머물러 있다.

▲ 러시아 공사관 탑

3층의 하얀 탑으로 남은 러시아 공사관. 왕비의 시해에 뒤 이른 왕의 경복궁 탈출이 이곳 공사관으로 이어졌다. 아관파천의 무대다.

ⓒ 이영천

러시아 공사관 터를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극심한 격동기를 지나며, 언덕 위에 크고 웅장하던 공사관은 하얀 탑만 남았다. 그랬어도 터를 매매한 문서는 남아 있었다. 개혁개방을 앞세운 소련이 해체되던 와중, 우리와 수교를 맺으며 그 매매 문서를 들이민다. 옛 공사관 터를 돌려달라는 요구다.

하지만 그 자리는 이미 시가지였다. 강남으로 이전하고 비어 있는, 근처 배재학당 빈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 터에 대사관이 들어섰고, 그곳은 더는 걸을 수 없게 되었다. 하필 그리로 성벽이 지난다.

▲ 정동 제일감리교회

미국 북 감리회가 정동에 세운 교회. 배재학당, 이화학당과 함께 이식된 근대화의 상징과 같은 존재다.

ⓒ 이영천

러시아 대사관 옆이 정동 제일감리교회다. 이화여고와 배재학당을 설립한 미국 북 감리회가 원류다. 정동길을 노래한 어느 대중가요에, 조그만 교회당으로 묘사되는 곳이다. 얼마나 많은 낭만과 사연이 이 길에 흩뿌려졌을까. 남쪽 언덕 위 뱀의 얼굴을 한 북향의 일제 법원이 있다. 미술관으로 변신한 이곳에선 얼마나 악랄한 판결과 억울한 희생이 뒤따랐을까.

▲ 배재학당 동관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배재학당 동관. 사진 속 건물 뒤쪽에 임진왜란 당시 가토가 말을 묶었다는 향나무가 있다.

ⓒ 이영천

미술관 옆길로 배재학당에 닿으면, 학사모에 망토를 걸친 학도가 걸어 나올 것 같은 동관이 멋스럽다.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이다. 그 앞에 나이 든 늠름한 향나무가 있다.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가 이 나무에 말을 묶었다던가. 배재학당을 빙 돌면 드디어 성벽 구간이다. 가느다랗게 남은 자투리 공원 길이, 성벽이 지나던 자리다.

그 길을 돌아 평안교회 앞길로 나서면 비로소 서소문이다. 이식된 근대는 이렇게 길을 막으며 자리를 빼앗았다.

오로지 흐름으로 내몰린 도시

소의문(서소문) 자리를 찾기가 어렵다. 표석이 있는 곳이 문 자리는 아니다. 철거 중인 서소문 고가도로 시작점이 분명하나 흔적이 없다. 작은 문이, 그래서 힘없이 자취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을까.

▲ 소의문(서소문) 표석

서소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고가도로 초입 언덕. 이 주변은 온통 공사판이다. 고가도로는 철거 중이고, 서소문로에 잇닿은 옛 신문사와 맞은 편에서 재개발이 한창이다.

ⓒ 이영천

힘겹게 서소문로를 건너면 세종대로7길이다. 유럽 도시들은 허물어진 성곽 자리가 도로가 되었다. 따라서 어지간한 도시들은 순환도로(ring-road)를 갖추어 도시공간구조를 결정지었다. 성곽이 지났던 세종대로7길도 그런 기능일까. 글쎄다.

▲ 세종대로7길

성벽이 지나간 세종대로7길. 왼쪽 흰색 건물 아래에 옛 성벽의 흔적이 남아있다. 성벽은 칠패시장을 지나 숭례문에 가 닿는다.

ⓒ 이영천

옹색한 도로 폭에 비하면 주변 마천루는 가히 아찔할 지경이다. 한양도성 성곽이었음을 드러낸 낮은 담장이 그나마 반가울 따름이다. 길이 벗어난 끝에서, 너른 칠패로와 살짝 겹친다. 칠패 시장이 섰던 자리다. 칠패 시장은 도성 안의 종로 시전과 어깨를 견주었다. 어물전을 위주로 갖은 물목을 사고팔았다.

이처럼 사고파는 힘이 성벽보다 강했다. 서소문과 숭례문의 기능을 침략자인 왜인들도 간과하지 않았다. 나라를 빼앗고, 그들이 근거지 삼은 곳이 남대문 인근의 명동과 충무로, 남산자락이다. 종로에 대한 반발로 성 밖 칠패가 남대문 시장으로 확산 번성하였다. 서울역이 도성 관문인 숭례문 가까이 자리하게 된 것도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다.

▲ 칠패로

숭례문 밖, 한양도성 성벽에 잇닿아 있었던, 칠패시장이 있던 자리.

ⓒ 이영천

성벽을 무너뜨린 건 일제다. 잊지 말아야 할 역사다. 그러나 정작 성벽을 허문 주역은 따로 있었는지 모른다. 사람과 재화의 흐름이 성벽의 강고함을 이겨냈을 수도 있다. 절박한 욕망의 분출이었기 때문이다. 이식된 근대화는 그처럼 수탈을 기재로 허덕이며 밀려왔다.

무척 짧으나 너무도 복잡한, 성벽 없는 구간을 지나왔다. 불가피했겠으나 종교와 병원, 학교를 앞세운 침략적 제국이 이 공간을 좋아한 이유도 충분히 이해된다. 결과로 정동교회, 배재학당, 이화여고, 각국 외교관사가 남았다.

이곳 성벽은 지키기보다 헐리기를 강요당했다. 성벽 없는 도성은 차단보다 직접 접촉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경운궁이 여기서 정궁처럼 버텨야만 했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지킬 수 없는 상황으로 떠밀려서야, 무능한 왕은 몸부림 같은 절규를 내뱉었다. 안타깝지만, 망국의 역사도 기억해야 할 우리 역사다.

▲ 숭례문

한양도성의, 아니 조선의 정문이었던 숭례문.

ⓒ 이영천

숭례문은 여름이다. 문의 좌우 성벽이 큰길에 잘려 나갔다. 도성은 이 구간에서부터 무너져 내렸다. 1907년 왜 황태자가 지난다는 명분이었으나, 성곽 스스로 자신을 허물었는지도 모른다. 이후 길과 사람, 시장과 학교에 터를 내주었다. 성벽 없는 성곽 터는 도성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가 이식·침투한 자리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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