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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웅의 굴욕적 충성 서약, 그의 손에 들린 맥주의 정체 [윤한샘의 맥주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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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한샘의 맥주실록] 스코틀랜드 구한 늪지대와 에일의 역사

"프리덤!!!"

사형이 집행되기 전, 온 힘을 다해 '자유'를 외치는 남자.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마지막은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명장면이다. 주인공의 이름도, 무엇 때문에 죽는지도 희미하지만, 장렬히 산화하는 멜 깁슨(윌리엄 월리스 역)의 표정과 목소리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1995년 개봉한 브레이브 하트. 스코틀랜드 독립영웅, 윌리엄 월리스와 로버트 브루스를 다루고 있다

ⓒ 파라마운트

종종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 다른 나라의 역사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깊이 몰입하기 힘든 순간이 오곤 한다. 돌이켜 보면, <브레이브 하트>도 그랬던 것 같다. 지금은 대영제국으로 묶여 마치 한 나라처럼 보이는 영국과 스코틀랜드 사이에 어떤 역사가 있었는지 모르면서 참혹하게 죽는 주인공에 가슴 아파했다.

넷플릭스 영화 <아웃로 킹(Outlaw King)>에 눈길이 간 것도 평소 품고 있던 스코틀랜드 역사에 대한 작은 호기심 때문이었다. 짧은 소개에는 14세기 스코틀랜드 왕이 된 '로버트 브루스'의 영웅적 서사를 다루고 있다고 나와 있었다.

생각해 보니, <브레이브 하트>도 스코틀랜드의 독립 영웅, 윌리엄 월리스를 다룬 작품이었다. 그 속에서 로버트 브루스는 영국 측에 서 있다가, 윌리엄의 죽음 이후 각성하는 귀족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그의 영도 아래 베녹번에서 영국군을 향해 돌진하는 장면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아웃로 킹>은 두 인물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을까? 로버트 브루스 중심으로 바라본 스코틀랜드 독립 이야기는 어떤 색깔일까? 혹여 두 영웅이 맥주라도 함께 마시는 장면이 나오지 않을까? 어느새 나의 손은 홀린 듯 '지금 재생' 위를 향하고 있었다.

혼란의 스코틀랜드 왕국

1296년, 영국 왕 에드워드 1세는 대군을 이끌고 스코틀랜드 땅을 침공했다. 영국이 내세운 명분은 스코틀랜드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는 것. 스코틀랜드는 대내외적으로 불안정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10년 전 안정적인 치세를 이어가던 알렉산더 3세가 사고로 죽은 후, 왕권은 줄곧 공백 상태였다.

권력의 부재 속에 스코틀랜드 귀족과 주교들은 '스코틀랜드 수호자(Guardians of Scotland)'를 조직하고, 차기 국왕 선출에 나섰다. 공정한 왕의 선출을 위해서는 중재자가 필요했다. 그렇게 선택된 사람이 영국의 왕, 에드워드 1세였다.

하지만 에드워드 1세는 흑심을 품고 있었다. 그는 이번 중재를 스코틀랜드를 자신의 발밑에 둘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결국 무능한 존 베일리올을 꼭두각시 왕으로 세운 에드워드 1세는 사사건건 정치에 개입하며 세금과 군역을 강요했다.

수탈에 분개한 스코틀랜드 귀족은 무력한 존 베일리올의 실권을 박탈하고 12인의 수호자를 결성했다. 나아가 영국과 전쟁 중이던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이런 스코틀랜드의 움직임은 영국에겐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영국 치하에 들어간 스코틀랜드

1296년 4월 27일, 항구 도시 베릭에서 대학살을 벌인 영국군은 북진을 개시했다. 스코틀랜드 군은 던바 성 외곽에 최후의 저항선을 구축하고 결전을 준비했으나 결과는 대참패였다. 수적으로는 앞섰을지도 모르나 전략과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아웃로 킹>은 바로 이 '던바 전투'에서 시작된다. 존 베일리올과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에드워드 1세 앞에서 영국의 신하로서 충성을 맹세한다. 이 장면은 단순한 항복 선언을 넘어선다. '스코틀랜드의 수호자'라는 지배 체제의 완전한 이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를 왕국(kingdom)에서 영지(land)로 강등시킨 영국은 총독을 파견하고 각 성에 세금과 물자 징발을 위한 수비대를 주둔시켰다. 영화의 주인공, 로버트 브루스 또한 던바에서 자신의 성으로 귀환한 뒤, 희망이 사라진 무기력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로버트 브루스에게 각성의 순간이 찾아온다. 세금을 내기 위해 도착한 퍼스 성. 광장 중앙에 걸려 있는 무엇인가를 목격한 백성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그리고는 근처에 있는 영국군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브레이브 하트> 스틸컷

ⓒ 파라마운트

그들이 목도한 건, 윌리엄 월리스의 찢긴 사지. 하급 기사 신분으로 에드워드 1세에 맞섰던 그는 '스코틀랜드 수호자'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하지만 팔커크 전투에서 패한 뒤, 스코틀랜드 귀족의 배신으로 1305년 8월 런던에서 온몸이 찢기는 형벌 끝에 생을 마감했다.

<브레이브 하트>가 팔커크 전투에서 윌리엄과 로버트의 운명적인 조우를 각색했다면, <아웃로 킹>은 윌리엄 죽음 후, 로버트 브루스의 각성을 통해 독립 영웅의 서사를 완성했다. 영화는 퍼스에서 돌아온 로버트 브루스가 윌리엄의 죽음을 계기로 왕이 되는 과정을 그리지만 실제 역사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극 중에는 고뇌하는 '언더독'처럼 묘사되나 사실 그는 스코틀랜드 귀족 중 강력한 힘과 영토를 가진 실력자였다.

이미 윌리엄 월리스 뒤를 이어 '스코틀랜드의 수호자'로 등극할 정도로 권력이 있었던 그는 겉으로는 에드워드 1세의 충실한 가신을 자처했지만, 뒤로는 스코틀랜드 주교들과 비밀 동맹을 맺으며 왕좌를 노리던 냉철한 전략가였다.

에드워드 1세는 그런 로버트 브루스의 야심을 진즉에 간파하고 있었다. 윌리엄 월리스 사형 이후 궁지에 몰린 브루스는 사면초가의 위기에 몰려있었다. 에드워드 1세의 손에 죽을 것인가, 아니면 왕이 되어 돌파할 것인가, 남은 선택지는 양자택일 뿐이었다.

영화와 역사 사이에는 엄연한 간극이 존재하지만, 결국 그는 왕이 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이를 위해선 넘어야 할 큰 산이 하나 있었다. 자신의 경쟁자이자 또 다른 '스코틀랜드의 수호자', 코뮌 가문의 반발이었다.

법 밖의 왕

<아웃로 킹> 스틸컷

ⓒ 넷플릭스

1306년 2월 10일, 로버트 브루스는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에서 존 코뮌과 비밀 회동을 한다. 그는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고, 함께 영국에 대항할 것을 제안하지만 영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존 코뮌은 거절한다.

그 대가는 죽음. 비밀이 탄로 날 것을 우려한 브루스는 그 자리에서 코뮌을 살해한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순식간에 온 나라를 뒤흔들었다. 신성한 교회에서 살인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로버트 브루스는 신성모독으로 파문을 당한 뒤 도망자 신세가 된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스코틀랜드 교회가 그를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글래스고의 위셔트 주교는 코뮌 살해 직후 찾아온 브루스에게 고해성사를 베풀고 죄를 사해주었다. 그리고 대관식에 필요한 예복과 왕관을 내어주며 왕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명분을 마련해 주었다.

한 달이 흐른 같은 해 3월 25일, 로버트 브루스는 왕관을 쓰며 스스로를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선포한다. 드디어 법 밖의 왕, '아웃로 킹'이 탄생한 것이다. 비록 초라한 대관식이지만 '반역자'에서 '국왕'으로 신분이 바뀌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머틀과 헤더의 맥주

중세 스코틀랜드와 영국을 그리고 있는 <아웃로 킹>은 곳곳에서 맥주가 등장한다. 던바 전투 후, 에드워드 1세에게 굴욕적인 충성을 서약한 로버트 브루스 손에 들린 음료는 맥주다. 맥주는 군사들에게 건강과 에너지를 보충해 주는 중요한 보급품이었다.

이들이 마신 맥주는 어떠했을까? 엄밀히 말해 이 시대에는 '맥주'(beer)보다는 '에일'(ale)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확하다. 에일은 원래 홉이 들어가지 않은 맥아 발효주를 의미한다. 14세기 초 브리튼 섬에는 아직 홉이 사용되지 않았다. 대신 '그루트'라는 허브혼합물을 첨가해 쓴맛과 향, 보존성을 높였다. 스코틀랜드와 영국, 두 나라 모두 맥아를 발효한 에일을 즐겼지만 기후와 토양의 차이로 허브의 종류는 달랐다.

스코틀랜드 헤더 에일을 복원한 프라오크 에일. 실제 헤더를 넣어 양조했다.

ⓒ 윤한샘

같은 브리튼 섬이지만 스코틀랜드의 땅은 단단한 화강암과 편암으로 이루어져 물이 빠지지 않아 습지가 많았다. 자연스럽게 스코틀랜드 에일에는 습지와 늪에 풍부한 '보그 머틀'(bog myrtle)과 '헤더'(heather)가 들어갔다.

더구나 스코틀랜드의 풍부한 '이탄'(peat)은 맥아에 날카롭고 강한 페놀 향을 선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마 윌리엄 월리스나 로버트 브루스가 마시던 에일은 페놀 향이 피어오르는 어둡고 탁한 음료였을 것이다. 발효에서 오는 약간의 신맛은 갈증을 해소 시키고, 보그 머틀이나 헤더에서 스며든 향신료와 꽃향은 거친 스코틀랜드 에일을 지루하지 않게 하지 않았을까?

반면 부드러운 석회암과 사암처럼 퇴적층이 만든 영국 토양은 비옥하고 배수가 잘되어 상대적으로 농작물에 적합했다. 에드워드 1세가 마시는 영국 에일에는 향긋한 로즈메리와 세이지가 들어갔다. 결정적으로 영국 에일은 이탄이 주는 페놀 향이 없어 기품이 흘렀을 것이다.

영웅, 로버트 브루스

1306년 스스로 왕이 되었지만, 다른 귀족의 견제와 몇 차례 전투의 패배로 브루스의 세력은 초라했다. 하지만 생명을 부지하며 버티던 그에게 조금씩 반전의 계기가 찾아온다. 전면전을 할 수 없었던 브루스 군대는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며 적에게 타격을 주기 시작했다. 특히 영국군의 거점이었던 성을 침투해 불을 지르며 완전히 초토화 시키는 영리함을 보여주었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로버트 브루스가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주교들은 '브루스를 돕는 것이 천국에 가는 길'이라며 설교했다. 수도원은 브루스 군대에게 수시로 빵과 맥주를 공급하는 보급 역할을 맡기도 했다. 영국의 지배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점차 브루스를 진정한 왕으로 여기며 게릴라전에 힘을 보탰다.

1314년 6월 23일, 마침내 로버트 브루스를 중심으로 뭉친 스코틀랜드 군과 영국군이 베녹번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였다. 영화에서는 배녹번으로 가는 도중 에드워드 1세가 사망하며 아들 에드워드 2세가 군을 이끄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 역사에서 에드워드 1세는 1307년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무능하고 자만심이 강했던 에드워드 2세는 기마병과 장궁병으로 무장한 2만 명의 영국군이 쉽게 승리할 것이라 판단했다. 로버트 브루스는 이런 오만함을 역이용했다. 배녹번은 습지와 늪지대가 많은 지역이었다.

영국군을 좁은 늪지대로 유인한 스코틀랜드 군은 진흙탕에서 기동력이 약해진 기마병을 공격했다. 긴 창으로 이루어진 밀집 보병 진형 '실트론(schiltron)'이 늪지대 빠진 영국 기병을 막아섰다. 길목에 파 놓은 함정은 혼란을 가중 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숫자만 믿고 무리하게 밀어붙인 에드워드 2세는 속절 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고, 영국군이 자랑하던 장궁병조차 무용지물로 전락하며 대패 하고 말았다. 배녹번 전투의 결과는 두 왕의 운명을 갈라 놓았다. 에드워드 2세는 영국 귀족들에게 축출 당한 반면, 로버트 브루스는 명실상부한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올라섰다.

1328년, 에드워드 1세의 침공으로 식민지가 되었던 스코틀랜드는 다시 독립 왕국의 지위를 되찾았다. 거친 토양과 습지, 늪지대야 말로 진정한 스코틀랜드의 수호자였다.

맥주, 독립의 힘

14세기 프랑스 연대기 작가 장르벨(Jean Le Bel)은 배녹번 전투를 언급하며 스코틀랜드 군이 귀리죽을 먹었다고 전한다. 대규모 보급에 의존하는 영국군과 달리 스코틀랜드 병사들은 말에 귀리 가루 한 주머니로 허기를 달랬다. 때론 귀리 가루는 에일이 되어 갈증을 씻어주고 사투를 버티게 하는 용기가 되었으리라.

월리스가 영국의 지배에 맞서 저항의 불씨를 지폈다면 브루스는 그 불씨를 왕국으로 만든 인물이다. <브레이브 하트>와 <아웃로 킹>은 서로 다른 궤적을 그리지만, 결국 스코틀랜드라는 강물로 합쳐진다.

스코틀랜드 독립 영웅, 로버트 브루스를 그린 영화, 아웃로 킹

ⓒ 넷플릭스

200년이 흘러 스코틀랜드와 영국은 제임스 1세라는 같은 왕을 맞이하고 다시 200년이 뒤 정치, 경제적 통합을 이루며 대영제국이 탄생했다. 하지만 맥주 만큼은 끝내 통합되지 않았다. 한 섬에 살지라도 토양과 기후는 '스카치 에일'과 '잉글리시 에일'이라는 다른 스타일을 남겼다.

어쩌면 한 나라의 정체성은 왕이나 국경이 아니라, 사람들이 매일 마시는 한 잔의 술 속에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프리덤', 3월,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모든 이들을 위해 건배.

덧붙이는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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