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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날개 펼치듯 뻗어있던 숭례문 성벽을 볼 수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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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순성⑥] 숭례문~남산... 모진 권력의 시간을 견디다

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기자말>

숭례문은 도성, 아니 조선의 정문이라 할 만하다. 불타던 2008년의 순간을 잊지 못한다. 화염에 모두의 가슴도 무너져 내렸다. 그때 숭례문은, 이성계가 세운 성문이 아니었다. 지세가 낮아 무너질 염려였을까, 아니면 풍수지리를 고려했을까.

본래 터를 돋우고 다져, 세종이 1448년 다시 짓는다. 그 자리에서 숭례문은 온갖 전화와 풍상을 꿋꿋이 견뎌냈다. 임진왜란도 한국전쟁도 비켜갔다. 600년에서 40년 남았었다. 그런데 불 타고 말았으니, 모두의 절망이 오죽했을까. 가히 비탄에 젖기에도 모자랐다.

▲ 숭례문과 성곽(1904)

숭례문 좌우로 마치 새가 날개를 펼친 것처럼, 성곽이 팔을 벌려 뻗었다. 그 안 정점에 숭례문이 우람하다.

ⓒ 국가유산청

왕의 행차와 외교 사절이 이 문에서 이뤄졌다. 절대 권위였다. 년 중 가장 왕성하다는 여름을 상징한다. 만물이 생동한다. 그랬으니 권위를 갖추기에 제격으로, 국가 의례는 늘 이 문에서 시작되었다. 나라의 기준이었다. 단순한 성문이 아니라, 도성의 위계와 질서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공식 출입구였다.

왕조의 백성은 정해진 시간에 분명한 목적이 있을 때만 검문을 거쳐 숭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무시로 드나드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숭례문을 드나드는 행렬은 곧 국가를 상징했기 때문이다.

숭례문이 남쪽에 자리한 이유는 행정과 군사적 판단만은 아니었다.

▲ 숭례문

화기(火氣)를 상징하는 관악산을 향해 현판을 세워서 썼다. 땅의 기운이 가장 왕성한 곳에 도성 정문을 앉혔다. 도성 조영에 유교 철학이 반영된 대표적인 사례다. 2026년 3월 중순 촬영.

ⓒ 이영천

오행에서 남쪽은 불에 해당하고, 불은 또한 예(禮)를 상징한다. 그래서 화기(火氣)의 관악산을 향해 세워진 현판을 썼다던가. 정기가 가장 충만한 방향에 도성 정문을 둔 건 하나로 관통하는 세계관에 따라 한양도성을 설계했음을 보여준다.

숭례문은 사람만 드나드는 문이 아니라 계절과 시간, 국가의 권위를 함께 들여보내던 관문이었다. '崇禮(숭례)'라는 이름 또한 이 문 앞에서 국가가 어떤 질서를 요구하는지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한양도성의 대표 건축물로서 근정전과 함께 유교적 세계관의 결정체인 셈이다.

문 양쪽으로 새가 날개를 펼치듯 성벽이 뻗어 있었다. 가장 안쪽에서 문이, 길과 사람을 빨아들이듯 잔뜩 오므리고 있었다. 지형을 따라 방어에 가장 유리한 모양을 취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흔적은 눈 씻고 찾아도 볼 수가 없다. 왜 황태자가 방문한 1907년에 헐리고 나서, 다시는 쌓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길이 된 자리

서울역에서 시작된 퇴계로가, 1939년 소화통(昭和通)으로 개통된다. 왜의 연호인 '昭和(소화)'를 가져다 쓴 건 영구 통치를 획책했음일까. 길이 생겨나, 남산을 잇던 지맥이 무참히 잘려 나간다. 1925년 일제가 남산에 세운 '조선신궁'을 만들 때도 잘리지 않은 지맥이었다.

▲ 퇴계로1

남산을 향해 오르던 성벽이 지나던 곳에서 바라 본 퇴계로. 멀리 서울역이 보인다.

ⓒ 이영천

이 길은 숭례문이 더는 문이 아닐 때 생겨났다. 이로써 숭례문~남산을 잇던, 한양도성의 기운이 힘을 잃었다. 성곽이 허물어져 형태를 잃은 구간은 있었어도, 이처럼 산자락이 잘려버린 건 처음이었다. 이후에는 물론 잦은 일이 되었지만 말이다.

1930년대 일제는 서울을 군대 주둔과 이동, 군수품 수송에 적합한 도시로 개조하려 시도한다. 뒤따라 이전보다 더 극심한 도성 해체가 자행된다. 그 방향으로 모든 정책과 자본, 힘이 모인다. 조선시가지계획령에 따라 택지와 산업단지가 곳곳에 들어선다. 철도 체계가 고도화한다. 조차장과 철도역이 군사기지로 집중된다. 직선 도로가 개설된다. 퇴계로는 그 과정에서 남산과 도심을 연결하는 간선도로로 만들어졌다.

▲ 퇴계로2

남산 자락이 잘려나간 곳에서 바라 본 퇴계로. 남대문 시장 방향의 모습이다.

ⓒ 이영천

성곽이 사라지자, 도성이 간직하던 쉼과 배려의 공간도 함께 소멸한다. 직선의 즉자적 도발이 피식민지 시민의 의식까지 갉아 들어온다. 총의 서늘함과 칼의 날카로움이 시가지에 그대로 투영된다. 의례와 일상, 염원과 안녕을 빌던 장소가 아니다. 모두의 마음이 한데 모이던 장소가, 빠른 통과를 매개하는 도로로 바뀌었다.

지금이라고 다를까. 여유로운 발걸음보다 차의 속도를 우선시하는 공간이 서울이다. 걷는 도시에서 속도의 도시로 전환이 길 위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숭례문이 품고 있던 계절과 질서의 감각은 퇴계로에서 더는 설 자리를 얻지 못했다. 남대문 시장 언덕길을 지나는 퇴계로는 식민지 시대의 오롯한 잔해다.

무례하게 올라앉은 것들

퇴계로 건너 남산에 오르면 전혀 다른 산의 얼굴이 드러난다. 남산을 차지한 왜인들이 그들의 신사를 남산에 세운다. 강제 병합 이전, 왜인들이 생활과 신앙을 통해 공간을 점유한 하나의 사례다. 그 바람에 남산은 조선을 수호하는 산에서 왜인들의 신앙 공간으로 성격이 바뀌어 간다.

이는 일제의 침략과 궤를 같이한다. 강화도 조약으로 돈의문 밖에서 시작한 일본공사관이, 도성 안으로 들어와 군사를 배치하게 된 계기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다. 한성조약 결과로 일제의 근거지가 남산자락으로 결정된다.

▲ 남산(1920년대 후반)

남산에 일제가 세운 '조선신궁(1925)'의 계단이 뚜렷하다. 사진 중앙의 좌측에 숭례문이 보인다.

ⓒ 서울역사박물관

따라서 조선에 온 왜인들도 자연스레 남산자락에 모여 살기 시작했다. 미개한 왜 문화의 영향일까. 그들이 거주하는 공간에, 그들의 신을 모시는 신사를 짓는다. 1898년 남산대신궁이 시작이다. 군국주의로 치닫던 일제가 국민을 통제할 수단으로 이를 활용한다. 민간의 신사를 1916년 경성신사라며 융숭하게 대접한다. 그러다 결국 국가가 주도하는 신궁으로 전환한다. 1925년 남산에 조선신궁을 건립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당시 사진에도, 강렬한 축선의 계단과 신궁이 흉측하게 남산을 짓누르고 있다.

▲ 조선신궁(1926)

남산의 서북쪽 산자락에서 숭례문과 경복궁을 향해 앉은 일제의 조선신궁. 멀리 갓 지어진 서울역이 보인다.

ⓒ 서울역사박물관

조선신궁이 세워지면서 남산은 식민 권력의 국가 제단이 되었다. 민간 신앙 위에 국가 권력이 깔고 앉아, 남산은 천황 숭배를 강요하는 공간으로 재편됐다. 조선인은 이 궁에만 절을 해야 했다. 도성을 수호하던 산이 침략자 정신을 대변하는 '지배의 산'으로 변신한다.

해방 무렵 조선신궁은 일제에 의해 자진 철거된다. 조선인에게 당할 치욕이 두려워서였을까. 신궁에 두었던 신체와 중요 부재를 왜로 실어 나른다. 강제로 이식된 신앙은 그렇게 도망치듯 사라졌다.

▲ 한양도성 유적 전시관

조선신궁이 깔고 앉았던 자리의 현재 모습. 앞의 하얀 지붕 아래 한양도성 성벽 유적이 있고, 그 오른쪽이 일제의 조선신궁 배전 터다. 둥근 파랑이 옛 분수대다.

ⓒ 이영천

그러나 터는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망상에 사로잡힌 독재자가 있었다. 1950년대 이승만 동상이 세워진다. 버젓이 자행된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동상은 철거되었으나, 그처럼 남산은 늘 권력에 이용당했다. 또 다른 권력은 이 산에 무시무시한 기관을 두었다. 인권 말살과 고문이 일상이었다. 비밀리에 자신의 얼굴을 감추는 장소가 되었다.

신궁으로 오르던 계단에 백범광장이, 일제 신궁 터는 여러 시설로 바뀌었다. 그 한쪽에 옛 도성 성곽이 헐벗은 모습으로 드러나 있다. 누구의 남산이었는지가 아니라 무례하게 누가 차례로 올라앉았는지 보여주는 장소다.

떠나고 다시 들어서고

왜의 신사는 물론 식물원, 분수대 등 갖가지 시설이 오갔다. 일부분에 불과하나 성곽이 복원되면서 남산에 가장 오래된 도성이 윤곽을 드러냈다.

▲ 한양도성

남산에서 바라 본 한양도성. 인왕산과 백악산이 어렴풋하고 그 뒤로 희미한 북한산이다. 우측으로 낙산자락이, 그 앞으로 창덕궁과 종묘로 이어지는 숲이 보인다.

ⓒ 이영천

여러 시대의 무례가 지나간 자리로 남산이 다시 도성의 안산(案山)으로 돌아왔다. 숭례문이 도성 정면이라면, 이 산은 도성을 굽어보며 서기를 내뿜는 지킴이다.

성곽을 따라 정상에 오르면 봉수대 다섯이 나란하다. 도봉산 오봉이 축소되어 여기로 옮겨졌을까. 위급을 알리는 시설답지 않게 앙증맞다는 생각이 든다. 팔각정이 눈에 들어온다. 팔각정 자리가 옛 국사당 터다. 지금은 표석만 남았다.

▲ 남산 봉수대

도봉산 오봉이 연상되는 남산 꼭대기의 옛 봉수대.

ⓒ 이영천

남산 꼭대기는 외부의 침략과 위급을 가장 먼저 감지하고 불과 연기로 도성에 소식을 전하던 최종 종착지였다. 동시에 이곳은 국가 제의와 민간 신앙이 겹쳐 있던 공간이기도 했다. 원래 남산에는 국사당이 자리해, 나라와 왕실, 도성의 안녕은 물론 무속 신앙의 중심 역할까지 겸했다.

▲ 남산 국사당 터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던 옛 국사당 터. 일제가 1925년 조선신궁을 세우면서 이곳 국사당을 인왕산으로 이전시켜 버렸다. 터엔 지금은 팔각정이 앉아 있다.

ⓒ 이영천

국사당은 1925년 일제의 조선신궁에 밀려 인왕산으로 이전 당한다. 이성계가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한다. 그러면서 나라와 도성 수호의 상징으로 남산 꼭대기에 국사당을 세웠다. 유교를 숭상했음에도 이런 당집을 설치한 배경엔, 도성 안산인 남산을 어찌 보았는지가 드러난다. 백성의 기원까지 말살하기가 어렵다는 배려도 있었다.

▲ 남산타워

남산 정상에 있는 탑 둘과 팔각정의 모습이다.

ⓒ 이영천

그러나 꼭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었다. 구한말 진령군이 있었다.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왕후 민씨의 성정으로 미루어, 남산에서 굿을 벌였을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 제도 밖의 토템과 기복신앙이 이 산에 머물러 있었음을 보여준다. 국사당도, 제단도 떠난 뒤 남산 꼭대기는 높다란 탑의 차지로 되고 말았다.

산 밑으론 터널 셋이 서로 엇갈려 지난다. 온통 국토를 파헤쳐, 그게 필수 불가결이라 우기며 만들어낸 각박한 시대의 유산이다. 저 터널을 막아 다시 되메운다면 거대도시 서울이 멈춰서기라도 할까. 분주한 도시가 남산을 비켜간다. 도성은 물론 한강을 굽어보는 남산은 아무런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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