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아침에 노비로 전락해 64년을 살다간 단종비 정순왕후의 고향, 전북 정읍 칠보면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열풍이 당최 식을 줄을 모른다. 주변엔 세 번이나 봤다는 이도 있다. 장면을 외울 정도인데도 그때마다 울컥하게 된다며 추켜세웠다. 이번 주말엔 1박 2일 여정으로 영화의 배경인 청령포를 찾아 강원도 영월로 가족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고도 했다.
한때 서점가에 돌풍을 일으켰던 역사 만화책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다시 꺼내 읽고 있다는 이도 만났다. 그는 세종실록부터 중종실록까지를 다룬 4~8권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읽고 있단다. 단종의 죽음과 세조의 가계를 알아야 영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껏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 중에 이런 작품이 또 있었나 싶다. 영화를 보고 감동한 관객들이 공간적 배경이 된 지역을 부러 찾아가고 급기야 서점까지 찾아가 영화 속 사건과 관련된 책들을 뒤져서 읽는 모습이 낯설기까지 하다. 가히 '왕사남 신드롬'이라고 부를 만하다.
단종이 최후를 맞은 청령포는 주중과 주말 가릴 것 없이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한다. 지난 한 달여 동안 영월군을 다녀간 관광객 수가 수십만 명에 달한다는 보도도 있었다. 인구수가 3만 5천 명 남짓의 영월군이 연일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
전국이 <왕사남> 영향권
<왕사남>의 파급력은 청령포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엄흥도의 자취가 남아있는 울산에도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엄흥도는 '역적'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다는 이유로 후환을 당할까 두려워 고향을 떠났다고 하며, 그 후손이 울산에 정착했다고 전해진다.
그뿐 아니다. 영화 속 악역으로 등장하는 한명회가 묻힌 충남 천안의 무덤에도, 조카 단종을 죽인 세조가 묻힌 경기도 남양주 광릉에도 관광객들이 넘쳐나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한명회가 말년을 보낸 한강변 압구정에 관한 호기심까지 불러일으키고 있다. 압구정은 그의 호다.
또, 단종 복위 운동을 벌이다 능지처참을 당한 사육신의 노량진 묘소와 그들의 생가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대전의 박팽년과 충남 홍성의 성삼문, 충남 서천의 이개, 경북 구미의 하위지, 경기 여주의 유성원, 경기 포천의 유응부 등, 말 그대로 전국이 <왕사남>의 영향권이다.
금성대군의 자취가 남아있는 경북 영주의 순흥면도 '핫스폿'이 됐다. 영화 속에선 단종의 윤허를 받아 군사를 이끌고 한양으로 진격하는 곳으로 그려지며, 일약 '충절의 고향'으로 발돋움했다. 조만간 산 너머 영월과 연계하여 '왕사남 투어' 코스가 개발될 거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경기 남양주에 자리한 단종비 정순왕후가 묻힌 '사릉(思陵)' 또한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남편 단종이 사사된 후 무려 64년을 노비로 강등되어 살다 간 그의 신산한 삶이 서린 곳이다. '왕사남' 열풍으로 인해 최근 영월에 묻혀 있는 단종과 합장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도 했다.
조선의 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일괄 지정되어 있어 합장은 쉽지 않은 일이다. 다만, 왕후 혼자만의 외딴 무덤으로 소외되어 있던 사릉의 존재감이 부쩍 커진 건 고무적인 일이다. 사릉이 단종비 정순왕후의 묘소라는 사실을 최근 비로소 알게 됐다는 이들이 태반이다.
그가 궁궐에서 내쫓긴 뒤 평생을 보낸 서울 종로구의 정업원 터와 인근 동망봉(東望峯)도 찾는 관광객이 늘었다고 한다. 정업원 터는 그가 초가를 짓고 생계를 잇기 위해 염색일을 하던 곳이며, 동망봉은 그가 남편 단종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동쪽 유배지 영월을 바라보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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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량부원군 송계생의 유허비 옆에 단종비 정순왕후의 태생지임을 알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 서부원
이렇듯 '왕사남' 열풍이 전국 방방곡곡을 휩쓸고 있지만, 의외의 '무풍지대'로 남은 곳도 있다. 단종비 정순왕후가 태어난 전북 정읍의 칠보면이 대표적이다. 이곳에서 태어나 당시 지방의 유력자였던 아버지 송현수를 따라 한양으로 이사했고, 열다섯의 나이에 단종비로 간택되었다.
영화에 직접 등장하지 않아서일까. 세조와 한명회, 금성대군 등은 물론, 단역으로 출연한 사육신들의 묘소와 생가에까지 관심이 쏟아지는 마당인데도 정작 정순왕후의 고향이 어디인지 궁금해하는 이는 거의 없는 듯하다. 그의 '비범했던' 삶을 떠올린다면 가장 먼저 찾았을 곳이다.
열일곱의 나이에 숙부로부터 죽임을 당한 단종의 삶이 비통할진대, 열여덟에 홀로 되어 평생 남편의 영혼을 위로하며 살다 여든둘의 나이로 숨진 그의 삶은 비통하다는 말로 다 담아낼 수 없다. 왕후에서 순식간에 노비로 전락한 그의 삶은 끼니도 해결할 수 없을 만큼 참담했다.
그는 구걸과 동냥을 통해 생계를 이어갈지언정 남편을 죽인 세조의 회유와 도움은 끝까지 거부했다. 야사에서는 그가 장수한 비결을 '원수'인 세조와 그의 후손을 향한 불타는 복수심에서 찾고 있다. 세종 연간에 태어난 그는 중종 때 세상을 떠났으니 무려 8명의 임금을 겪었다.
남편 단종을 향한 절개는 조선 후기에 와서야 비로소 인정받았다. 성리학적 대의와 명분을 앞세웠던 시절, 그의 삶은 만인의 표상이 됐다. 그가 죽은 지 177년 뒤인 숙종 때 단종과 함께 복권되었고 정순왕후라는 묘호를 받았다. 그에 얽힌 민간 설화가 유독 많은 것도 그의 비참했던 삶과 관련이 깊다.
정읍시 칠보면엔 그의 태생지를 알리는 유허비가 마을 어귀에 소담하게 세워져 있다. 유적의 이름이 등록되어 있지 않아 내비게이션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고, 인근 주민들에게 물어도 낯설어한다. 지방자치단체의 공무원들도 나처럼 그의 고향이 칠보면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참고로, 조선 시대에 정순왕후라는 묘호를 받은 이는 한 사람 더 있다. 바로 영조가 예순다섯 때 왕비로 맞아들인 열다섯 나이의 정순왕후가 그다. 영조 사후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사도세자를 폐위하고 정조의 개혁 정책에 반대했던 인물로, 노론 세력의 후견인을 자처했다.
내비게이션에 '정순왕후 생가'를 입력하면 충남 서산시 음암면으로 안내하는데, 그곳은 단종비가 아닌, 영조의 계비가 태어난 곳이다. 역사 교과서에서도 단종비에 대한 언급은 없고, 영조 때 정순왕후는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쇠망해 가는 조선왕조를 상징하는 인물이어서다.
<왕사남>의 열풍을 기다리는 사람들
결국 칠보 파출소 경찰관의 도움을 받았다. 그들도 반신반의하며 순찰차로 앞장섰다. 칠보면 소재지의 한복판이어서, 걸어서도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였다. 본디 정순왕후의 증조부인 송계생의 집터로, 그의 유허비 옆에 정순왕후의 출생지임을 알리는 비석을 따로 세워놓았다.
비석의 측면에 노태우 전 대통령의 이름이 새겨진 게 눈에 띈다. 비석은 그의 재임 시절인 1988년에 건립되었는데, 노 전 대통령의 모친인 김태향 여사의 고향이라는 사적 인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여하튼 정순왕후와 노 전 대통령 모친이 같은 고장 출신이라는 게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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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비 정순왕후 태생지를 알리는 비석 측면에 노태우 전 대통령의 이름이 또렷하다. 칠보면은 노 전 대통령의 모친 김태향 여사의 고향이기도 하다.
ⓒ 서부원
기실 정순왕후의 자취가 묻힐 만큼 칠보면 소재지 주변엔 볼거리가 많다. 고대부터 근현대까지 시대를 넘나드는 문화유산이 널려 있다. 이런 '노천 박물관' 같은 곳이 왜 이리 을씨년스러운지 의아할 따름이다. 내가 찾아간 주말에도 어느 곳엘 가나 한산하다 못해 썰렁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무성서원'이 정순왕후 태생지 바로 옆이고, 가사 문학의 효시로 평가받는 '상춘곡'의 무대가 칠보면이다. '상춘곡'을 지은 정극인의 묘소도 인접해 있다. 조선 후기 지방 사대부 가옥의 표본이라고 불리는 '정읍 김명관 가옥'도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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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무성서원. 고운 최치원을 배향하는 곳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단종비 정순왕후 태생지에서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다.
ⓒ 서부원
우리나라 최초의 유역변경식 발전소인 칠보 수력 발전소도 빼놓을 수 없다. 일제강점기 호남평야의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건설한 다목적 발전소로, 당시 호남 전역에 전기를 공급한 핵심 시설이었다. 섬진강 유역의 풍부한 수자원을 동진강 유역의 평야에 활용한 대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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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유역변경식 발전소인 칠보수력발전소의 모습. 이곳은 6.25 전쟁 당시 빨치산과 토벌대의 격전지이기도 했다. 뒤로 보이는 수압파이프 너머가 섬진강 유역이다.
ⓒ 서부원
지금도 가동 중인 발전소로, 사전 예약만 하면 언제든 발전소 내부를 관람하며 해설까지 들을 수 있다. 멀리서도 보이는 발전소의 돌출된 수압 파이프의 모습은 장관이다. 차를 타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따라 한참 오른 뒤 만나게 되는 고원의 평야는 고도의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순찰차로 나를 안내해 준 경찰관은 <왕사남>을 아직 못 봤다고 했다. 이 고장 사람 정순왕후의 생애를 알게 된 이상 영화를 안 볼 수가 없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동시에 이곳에도 <왕사남>의 열풍이 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강원도 영월보다 교통이 몇 배는 편리할 거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