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순성⑦] 남산~장충동, 일제와 권력이 남긴 아픈 생채기
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기자말>
남산엔 꼭대기까지 버스가 다닌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남산은 걸어 올라야 제맛이다. 꼭대기를 만끽했다면, 가급 반대편으로 걸어 내려오는 게 좋다.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꽃을 내려올 때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건 만난다면 그건 행운이다.
▲ 남산 버스 정류장
도성의 성벽과 남산타워, 차가 다니는 길의 끝에 버스 정류장이 있다.
ⓒ 이영천
성곽을 더듬어 동쪽으로 내려오는 길이 평안하다. 그러나 땅 밑으론 어두운 터널 세 가닥이 지난다. 모두 1970년대 독재 권력의 작품이다. 도심 산 밑으로 지나는 터널이 셋이나 된다는 건, 도시와 자연에 대한 인식이 그만큼 빈약했다는 방증이다.
체계적인 계획이나 있었을까. 절실했는지도 의문이다. 독재자에 아첨하려는 당시 시장들이 맹목으로 구상해낸 결과물은 아닐까. 깊이 모색하기보다 쉬운 방식을 되풀이했다. 무작정 산을 뚫고 보는 방식, 설득이 아닌 강압의 우격다짐이다. 터널이 끝나는 곳마다 산적한 도시문제가 일상으로 남았다.
▲ 남산 3호터널 공사(1977)
회현동 쪽의 3호터널 갱 입구, 1977년의 공사 현장 모습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터널은 단순하다. 선택지 없는 일방적인 흐름일 뿐이다. 거리가 단축되어 이동은 빨라지겠지만, 여백 가득한 길은 허용하지 않는다. 남산 밑으로 뚫린 건 그래서 길이 아니라 허세의 권위가 지나는 암흑의 공간에 불과하다.
명분은 효율이었을 것이나, 과연 셋이나 필요했을까. 아니면 당시 권력이 같은 방식으로 자기를 주입하려는 필요성 때문이었을까. 남산은 아직 그 질문에 답하지 않고 있다.
▲ 남산 성곽
남산 동쪽 방향으로 내려가는 한양도성 성곽. 산자락 숲이 보이는 멀리로, 국립극장과 호텔 등이 보인다.
ⓒ 이영천
어느 도시계획가의 수필이 떠오른다. 터널이 생길 당시, 전문가 몇이 모여 미래의 서울 모습을 구상하다 보니 남산이 없어져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단다. 그 회고담을 읽으면서 아연실색한 기억이 생생하다. 남산 없는 서울을 구상하다니, 놀랍기 그지없다. 그토록 빈약하고 각박한 세월을 우린 살아냈다.
남소문이 있었다.
한남동을 잇는 장충단로가, 남산 비탈면을 따라 천천히 높아진다. 1934년 장충단통으로 개통된 도로다. 오르막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다가 정점에서 갑자기 방향을 직각으로 꺾는다. 완만한 곡선이 아니라 분명한 직각으로 고개를 넘는다.
▲ 남소문 터
남소문이 서 있었다는 흔적이 작은 표석으로만 남았다. 옆이 장충단로로 동대문~한남동을 잇는다.
ⓒ 이영천
꺾이는 자리, 옛 타워호텔 옆에 남소문 터였음을 알리는 작은 표석이 서 있다. 표석은 길의 중심이 아니라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다. 남소문은 한양도성 남쪽에 작은 문이었다. 지금은 문도 성벽도 없이, 그 터를 알리는 표석만 남아 있다.
길은 남소문이 열렸던 터와 방향을 지나고 있을까. 오히려 문이 열린 방향을 피해 꺾인 건 아닐까. 터와 성벽을 없앤 주범이 일제라는 개연성을, 모든 설명으로 대신할 수 있을까. 온통 의문투성이다. 꺾인 각도가 지형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선택, 어떤 시기의 판단이 남긴 흔적처럼 보인다.
▲ 장충단로
국립극장 앞에서 본 장충단로. 직각에 가까운 각도로 꺾이는 도로가 많은 질문을 자아낸다.
ⓒ 이영천
1966년, 서울은 빠르게 변하던 도시였다. 불도저라는 별명을 가진 시장의 시대, 길들이 넓어지고 곧게 펴졌다. 장충단로 역시 그 흐름에서 지금의 얼굴을 갖게 되었다. 무한으로 뻗어나가리라는 욕망이 길의 표정에 그대로 남아 있다.
차들은 직각을 돌아 멈춤 없이 지나간다. 그러나 표석 앞에서는 잠시 속도를 늦추게 된다. 길은 앞으로 나아가지만, 기억은 길가에 작은 돌을 남겨 두었다. 장충단로는 그 둘이 갈라지는 지점을 지금도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
억압적 권위와 독재 권력의 흔적
국립극장을 지나 언덕 밑, 위아래로 건물이 나란하다. 하나는 자유를 이름으로 내건 자유센터이고, 다른 하나는 사교를 명분으로 삼은 서울클럽이다. 겉모습과 기능은 다르지만, 두 공간에는 공통된 공기가 흐른다. 위압과 침묵, 그리고 선택받은 자들만 드나들 수 있는 무언의 규칙이다.
▲ 자유센터
노출된 직선의 기둥과 둥글게 말아 올라간 외장에서, 허울 뿐이던 지난 시대의 권위와 체제 선전을 보는 듯하다.
ⓒ 이영천
자유센터는 반공과 국가를 말하지만, 콘크리트 질감은 개인보다 체제를 앞세웠던 시대의 언어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높은 축선과 압도적인 규모는 자유를 설파하기보다 복종을 요구하는 강압에 가깝다. 이 집에서 자유는 권력에 의해 정의되고 관리되는 형식적 개념이었다. 그러고 보니 집의 설계자 행적도, 집이 담아낸 내용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 서울클럽
고종이 외교와 문화, 사교를 위해 1904년 설립한 클럽. 운영과 회원제에 대해 여러 비판이 오간다.
ⓒ 이영천
서울클럽은 더 조용하다. 닫힘과 추천제, 공개되지 않는 회비는 배제를 제도로 두었다. 이곳의 권위는 구호를 외치지 않는다. 대신 오래된 전통과 국제성이라는 말로 자신을 은폐한다. 그러나 누가 들어가고 누가 배제되는지는 분명하다. 풍전등화의 나라보다 사교를 더 중요시한 고종의 작품이라서 그런가.
자유센터가 체제 권력의 감춰진 얼굴이라면 서울클럽은 사회 권력의 뒷모습이다. 하나는 크게 말하고 다른 하나는 숨어서 웃는다. 방식은 달라도 두 공간엔 같은 질문만 남았다. 이 공간을 차지한 집들은 과연 무엇을 지키려 했는가. 시민의 자유인지 아니면 권력 그 자체인지?
박문사와 호텔
▲ 모조 흥화문
경희궁에서 뜯겨 와, 오랜 시간 이 자리를 지켰던 '흥화문' 모조품. 흥화문의 수난이 우리가 겪은 근현대 수난의 척도다.
ⓒ 이영천
신라호텔 정문을 바라보면, 한때 경희궁 정문이 거기 서 있었음이 떠오른다. 흥화문은 궁을 지키던 문이었으나 일제에 의해 뽑혀 와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 입구로 떠밀렸다. 나라의 문이 침략자 사당을 드나드는 문으로 전락해 버린 셈이다.
해방 후 박문사는 사라졌지만, 문은 그 자리에 남아 영빈관과 호텔 문지기 노릇을 해야만 했다. 복원되지 못한 역사가 용도만 바뀌어 존속했다. 존치된 슬픔이다.
신라호텔 역시 순수 민간의 산물이라기보다 국가의 필요, 더 정확히는 독재자의 의지가 깊숙이 개입한 결과였다. 외빈을 맞이할 상징 공간이 필요했던 독재자의 비호가 있었다. 그가 재벌을 불러들였고, 재벌은 그 요청을 명확하게 수행했다.
▲ 한양도성
장충동 동남쪽 경계를 따라 이어지는 한양도성. 성곽 안쪽에 일제는 박문사를 세웠고, 독재권력은 그 자리에 재벌 하여금 호텔을 짓게 하였다.
ⓒ 이영천
모름지기 상호이익이 작용했다. 그렇게 호텔은 박문사 터 위에, 영빈관 연장선상에서 세워졌다. 일제의 공간과 권위, 개발독재의 필요와 자본의 계산이 포개진 자리다.
1988~1994년 흥화문이 경희궁으로 돌아갔어도, 그 시간까지 지워낸 건 아니다. 문이 떠난 자리에 남은 것은 모조품과 기억이다. 호텔이 누리는 지금의 격조와 후광은, 의도했건 아니건 치욕스러운 그때 역사에 잇닿아 있다. 화려한 호텔을 지날 때마다 그래서 우린 자꾸 되물어야 한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계승했고 청산하지 못한 건 무엇인가?
장충단과 장충체육관
장충단이다. 황제에 오른 고종이 1900년 군란과 정변, 을미(1895)년에 왕후와 함께 희생된 신하들 넋을 기리기 위해 남산 자락에 세운 단이다.
▲ 장충단 터
1900년 고종이 갑신정변과 임오군란, 을미사변 때 목숨을 잃은 신하와 군사들의 넋을 기리는 단을 쌓았던 자리다.
ⓒ 이영천
청일전쟁 후 무단으로 침탈해 온 일제에 왕후를 지키지 못했고, 나라 주권 또한 위태로웠다. 제단을 세우면서도 대한제국이라는 실체가 얼마나 허약한지 곱씹지 않았을까. 칼을 들지 못한 군주, 외세 진격 앞에 번번이 빗나간 판단들이 뇌리에 무시로 되살아났을 것이다. 제단은 충절을 기린 공간이지만, 동시에 무기력한 자신을 기록한 자리이기도 하다.
이후 제단은 공원으로, 제향도 사라지고 비석만 남아 시대를 견뎌냈다. 한적한 장충단공원 풍경 속을 거닐다 보면 한 나라 군주의 후회는 물론 나라가 받은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았음을 느낀다. 나무 사이로 스미는 바람에서, 어지러운 질문들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느낌이다.
장충단을 벗어나면 둥그런 지붕을 인 체육관이 나타난다. 1970년대 어린 시절, 시골에 살았던 덕분에 장충체육관에 가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 이름은 또렷하다.
김일 선수가 박치기로 상대를 눕히던 프로레슬링, 박찬희의 세계 챔피언 타이틀 방어전이 열리던 곳이 바로 이 체육관이었기 때문이다. 흑백 TV 화면 속 관중의 함성과 조명 아래 링은 시골 아이에겐 별천지였다.
▲ 장충체육관
한양도성 성벽이 잘려 지워진 끝자락에 장충체육관이 앉아 있다. 1970~80년대 이곳에서 벌어지는 경기를 통해 사람들은 억눌린 열망과 함성을 분출해 냈다.
ⓒ 이영천
장충체육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체육관'이다. 복싱과 레슬링, 씨름까지 갖은 승부가 모이던 스포츠 성지다. 직접 보지 못한 기억인데도, 이상하게 추억 속에 분명한 똬리를 틀고 있다. 그곳은 경기장 이전에, 각박한 시절을 버티게 해준 꿈의 공간이자 열광을 가감 없이 분출한 해방구였다.
옆 동호로에서 성곽이 끊어진다. 능선 따라 이어진 마을이 장충동 북단이다. 이 구간의 성벽은 대체로 남산에서부터 시작된 장충동의 동남쪽 경계와 일치한다. 장충동은 성안 마을이다.
지리적으로는 이전부터 존재하던 공간이지만 '장충동'이라는 이름과 공간적·상징적 정체성은 1900년 장충단이 생긴 이후에 형성되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장충단과 박문사. 힘겹지만 쓰러져 가는 나라의 자존을 세우려 몸부림친 공간에, 일제는 우리 안에 치욕의 시설을 들여앉힌 셈이다. 도성의 수호신이고자 했던 남산이 당한 치욕, 그건 바로 아픈 우리 역사 그대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