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가장에 이어 아들까지... 이민 가족이 마주한 배심원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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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기다리는 우편물이 없으면서도 매일 습관처럼 궁금한 마음으로 우편함을 열게 된다. 오늘 우편함에는 각종 광고물과 함께 캐나다 정부 기관에서 보낸 것으로 보이는 봉투 하나가 도착했다. 이곳 캐나다에서도 정부 우편물을 마주할 때면 설렘보다는 왠지 모를 긴장감이 앞선다. 대개 반가운 소식보다는 무언가 이행을 요구하는 통지서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살면서 늘 농담처럼 듣던 말이 있다. 아무리 좋은 일이 있더라도 경찰서나 법원은 멀리하는 것이 복 받는 길이라고 했다. 법이라는 존재가 그저 엄하고 무섭게만 느껴졌던 시절의 기억이 무의식중에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사는 나라가 바뀌었어도, 평범한 시민에게 법원이라는 공간은 여전히 심리적 문턱이 높게 느껴지는 곳이다. 그런데 캐나다 이민 생활 중 우리 가족에게 벌써 두 번이나 법원 출석 요구서가 날아왔다.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시민의 의무인 '배심원(Juror)' 후보로 지명되었다는 통지이다.
2년 전, 한국 방문을 한 주 앞두고 배심원 소환장이 날아왔을 때만 해도 "수많은 사람 중 어떻게 내가 선택됐을까" 하는 생각에 그저 희귀한 경험 정도로 여기며 사유서를 내고 참여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국에 거주 중인 큰아들 앞으로 법원의 노란 소환장이 다시 도착했다. 수만 명의 시민 중 무작위로 선정된다는 이 통지가 2년 사이 우리 가족 중 두 사람을 지목한 것이다. 로또 당첨만큼이나 희박한 확률이 연이어 찾아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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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BC주 대법원에서 보내온 노란색 배심원 소환장. 시민의 의무와 재판 참여 정보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 김종섭
사진 속 노란 종이에는 2026년 4월 27일 오전 9:15, 내가 사는 이곳 뉴웨스트민스터의 BC주 대법원으로 출석하라는 명령이 적혀 있다. 약 10일간 이어질 민사 재판의 배심원 후보가 된 것이다. 캐나다 배심원 제도는 일정한 경비를 지급하기도 하지만, 직장 생활이나 개인 일정이 바쁜 시민들에게 열흘 가까운 시간은 사실 '귀찮은 숙제'처럼 다가오기 마련이다. 아들 또한 현재 한국에 체류 중이니 다시 한번 면제 신청을 해야 하는 번거로운 절차를 밟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배심원 재판이 일부 형사 재판에 한정되어 있어 일반인들에게는 여전히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평범한 이웃의 민사 분쟁조차 시민들의 상식에 비추어 판단한다. 이전의 나에게, 그리고 이번에 아들에게까지 날아온 이 소환장을 보며 이제는 생각을 달리하기로 했다. 단순히 '재수 없게 걸린 귀찮은 일'이 아니라, 우리 가족이 이곳 캐나다 사회의 당당한 주인임을 일깨워주는 묵직한 메시지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으니 무거웠던 기분이 한결 가벼워진다.
비록 아들은 한국에 있다는 거리 때문에 참여하지 못하지만, 우편물을 바라보는 기분은 묘하다.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며, 이 사회가 우리 가족을 '공동체의 판단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구성원'으로 인정해 준 것 같아 한편으로는 든든한 소속감마저 느껴지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은 결국 이렇게 평범한 시민들이 자신의 귀한 시간을 내어 법정에 앉아보는 번거로움을 기꺼이 감수함으로써 유지되는 것이 아닐까.
시민으로서 한 번쯤 법정 배심원석에 앉아 타인의 권리를 보호하고 사회의 정의를 고민해 보는 일은 분명 근사한 경험이 될 것이다. 다음에 또 가족 중 누군가에게 이 노란 봉투가 배달된다면, 그때는 '피해야 할 번거로운 일'이 아닌 '당당히 참여해야 할 시민의 권리'로서 기분 좋게 응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