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라이프

명문가의 유산에서 눈에 띈 노비 문서

¬ìФ´ë지

구미성리학역사관, 오는 4월 26일까지 특별전 '봉곡의 충효세가' 열어

22일, 구미성리학역사관을 다녀왔다. 구미성리학역사관에서 오는 4월 26일까지 특별전 '봉곡의 충효세가'가 열리고 있다. 밀양박씨 경주부윤공파에서 집안 대대로 보관해온 고문헌·고문서·묘지석 등 530여 점을 기탁하면서 성사된 전시로, 이번에는 그 중 엄선된 유물 40여 점을 선보이고 있다. 이번 방문을 통해서 봉곡동의 명칭이 박수홍(당시 이 지역에서 존경받던 목민관)의 호에서 유래한 줄은 처음 알았다.

구미성리학역사관

ⓒ 여경수

구미시 봉곡동은 산업화되기 전부터 밀양 박씨와 벽진 이씨의 집성촌이었다. 봉곡동에 있는 선주초등학교가 세워진 지 100년이 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마을의 역사가 얼마나 깊은지 짐작할 수 있다.

이곳에서 조선 후기 밀양 박씨 경주부윤공파는 문무 과거 합격자와 효자와 열녀를 두루 배출한 노론 명문가로 성장했다. 역사적으로 구미 지역은 남인 세력의 본거지였다. 그런 지역에 서인(노론) 계열인 밀양 박씨가 자리를 잡고, 우암 송시열과 직접 교류를 했다는 사실은 이 집안의 정치적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현대에 들어서는 구미에 지역구를 두었던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박세직, 김영삼 정권 시절 검찰총장을 지낸 박순용도 봉곡동 출신이다.

나의 큰고모할머니가 봉곡동으로 시집을 가셔서, 어릴 적부터 봉곡동의 옛 이름인 '별남'을 '고모네 동네'로 자연스럽게 불렀다. 둘째 누님도 한때 이곳에 살았고, 지금도 처가 막내동서가 봉곡동에 살고 있으니 이곳과 인연이 깊다.

또한 나는 1997년 군 입대 직전, 도량2동에서 봉곡동으로 넘어가는 길이 막 포장되던 시절을 기억한다. 그 입구 주유소에서 난생처음 임시직으로 일했다. 당시 신용카드로 기름값을 내는 손님은 거의 없었다. 그 길이 뚫리면서 봉곡동 개발이 본격화됐고, 법원과 등기소가 이전하고 상권이 형성되었다. 지금은 많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도시의 모습을 갖춰갔다.

구미성리학역사관: 묘지석

ⓒ 여경수

그 개발의 물결 속에서 마을의 흔적들은 구미시립봉곡도서관 주변 공원으로 옮겨졌다. 봉곡동 입구를 알리던 큼지막한 돌, 효자비, 의구비가 그곳에 자리하고 있다. 한편 아파트 단지 뒤편에는 밀양 박씨 재실이, 봉곡초등학교 근처에는 벽진 이씨 재실이 새롭게 지어져 있다. 문중 토지가 수용되면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노비 문서

ⓒ 여경수

예전에 구미 향토사학자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들인 남인이 주로 거주했던 구미(선산) 지역에 서인 집안이 뿌리 내린 사연, 우암이 이곳을 찾은 배경이 이번 전시를 통해 맥락 있게 연결되었다. 도시 개발은 많은 것을 바꾼다. 자신들의 가문의 유산을 지역 박물관에 기탁하는 것은 역사를 이어가는 일이다.

이번 전시에서 밀양 박씨 가문의 교지, 묘지석 등도 흥미롭게 살펴보았으나, 나의 시선이 가장 오래 머문 문서는 노비 문서였다. 한 노비가 빚을 갚지 못해 12살과 9살의 자녀를 노비로 바친다는 내용의 문서이다. 조선후기 신분제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면서도, 당시 양반가문이 아닌 이들의 스산했던 삶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름없이 살아간 그들의 삶도 우리의 역사일 것이다.

¹ì‹ 2026´ëª…궁금˜ì‹ ê°€

지ê¸ë°”로 AI가 분석˜ëŠ” 가•교¬ì£¼ 리포¸ë 받아보세

´ëª… œë‚˜ë¦¬ì˜¤ •인˜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