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인 100색] 어부 정상록, 속도 거부한 채 때배 위에서 이어온 흔들림 없는 전통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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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파도를 가르며 작은 어선 한 척이 바다 위를 나아간다. 그 위에는 평생을 바다에 의지해 살아온 한 어부가 서 있다. 창경과 낫대, 닻을 능숙하게 다루는 그의 손놀림에는 수십 년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거친 파도와 고된 생업을 묵묵히 견디며 이어온 시간들, 그 시간은 그의 몸에 깊이 새겨져 있다.
3월의 끝자락, 겨울 기운이 남은 바다에서 팔순의 어부는 변하는 시대 속에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와 동행하며 마주한 것은 오랜 세월이 쌓아온 삶의 방식과 바다를 대하는 깊은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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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안에 떠오르는 일출과 함께, 때배를 끌고 바다로 나서는 어부의 고요하고도 단단한 하루가 시작된다.
ⓒ 진재중
바다를 읽는 어부의 눈
정상록(81세) 어부의 하루는 바람에서 시작된다. 그는 스마트폰의 기상 정보보다 먼저 얼굴을 스치는 바람의 결을 읽는다. 육지에서 거센 바람이 불어도 바다는 뜻밖에 잠잠할 수 있고 뭍이 고요해 보여도 먼바다는 높은 파도가 배를 위협하기도 한다. 바다의 날씨는 육지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흐르고 변덕이 심하다. 어부에게 바람을 아는 일은 생업이자 생명을 지키는 일이다. 바람은 길을 알려주는 신호이며 위험을 피하게 하는 나침반과도 같다.
"오늘은 파도가 잠잠하겠네."
앞바다를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내뱉는 말에는 경험에서 우러난 확신이 담겨 있다. 새벽에 바람의 결을 감지한 그는 지체 없이 트럭에 몸을 싣고 산모퉁이를 돌아 항구로 향한다.
안인항구에는 '엄마배'라 불리는 동력어선과 얼기설기 맞춰 만든 때배가 나란히 정박해 있다. 그는 어선에 줄을 걸어 때배를 매단 채 약 2킬로미터 떨어진 등명해변으로 향한다. 작업 장소가 멀리 떨어져 있어 모선을 이용해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선을 따라 줄지어 움직이는 때배의 모습은 마치 어미오리를 뒤따르는 아기오리처럼 보인다. 등명해변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풍경이다.
30여 분을 달려 도착한 등명해변에는 다양한 형태의 암반이 넓게 펼쳐져 있다. 해조류와 각종 해산물이 잘 자라는 천혜의 환경이다. 어부는 암반이 많은 바다를 가리키며 "여기가 밭으로 치면 옥토나 마찬가지야. 밭이 좋아야 작물이 잘 자라듯, 이곳은 여러 생물들이 잘 자라는 해변"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암반이 많은 지형에서는 일반 어선이 잘못 접근할 경우 엔진이 바위에 걸려 사고가 발생할 위험이 크다. 이런 곳에서 필요한 배가 바로 때배다. 나무로 만들어져 바위에 부딪혀도 작은 손상만 입고, 암반 사이를 빠져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정상록 어부는 이러한 특성에 조상의 지혜가 담겨 있다며, 때배야말로 암반 해역에 가장 알맞은 전통 어구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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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명해변에 도착한 정상록 어부는 모선에서 때배로 갈아 타고 암반 지대로 향한다.
ⓒ 진재중
파도와 함께 늙어간 시간
때배를 정박한 뒤, 어부는 네모난 상자를 바다 위에 드리운다. 유리창이 달린 상자 속으로 고개를 숙여 바닷속을 들여다보며 긴 장대를 쉼 없이 들어 올렸다가 내리기를 반복한다. 잔잔한 물결 사이로 그의 손놀림이 천천히 이어지고, 바다 위에는 오랜 세월 몸에 밴 어부의 리듬이 고요하게 흐른다. 활처럼 굽은 등과 달리 손끝의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다. 주변에는 함께하는 어부도, 다른 어선도 없다. 암반에 부딪힌 물살 소리만이 고요하게 퍼진다. 모든 일을 홀로 감당해야 하는 적막이 작은 배 위를 가득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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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을 바라보면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어부
ⓒ 진재중
몸으로 익힌 감각, 바다를 읽는 시간
이 작업은 겉보기에는 단순해 보이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허리를 굽혀 해산물을 건져 올리고 엉킨 줄을 하나씩 풀어내는 일까지 모두 그의 몫이다. 때배 위에서 이어지는 이 고된 작업은 정상록 어부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지난한 노동의 연속이다. 그는 물살과 바람의 변화를 한순간도 놓치지 않는다. 갑자기 높아지는 파도와 급변하는 바람에 몸을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감각은 오랜 세월 바다와 함께 살아온 사람만이 쌓아 올릴 수 있는 경험에서 비롯된다.
"언제 바람이 바뀔지 몰라. 새벽에 잔잔하던 바람도 오후가 되면 금세 파도를 일으키지. 욕심 부리다가는 바닷속에 갇히고 말아."
그의 말에는 바다를 향한 경외와 조심스러움이 함께 담겨 있다. 매일 같은 바다에 나서지만 단 한 번도 같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바람과 파도, 그 변덕을 읽는 일이 곧 삶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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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일렁이는 바다에서 창경과 낫대를 이용해 해산물을 건져 올리는 정상록 어부
ⓒ 진재중
묵묵한 동반자, 때배
그가 바닷일에 의지해 온 것은 작은 나무배 '때배'다. 군데군데 패이고 닳은 자국과 덧댄 판자들은 그의 세월과 삶의 무게를 말없이 보여준다. 거친 파도와 암반에 부딪히며 함께 견뎌 온 이 배는 오랜 시간 그의 곁을 지킨 묵묵한 동반자이자 삶의 일부가 되었다.
"이 배가 나의 동반자지. 마누라보다 더 나를 잘 알아."
그의 말에는 오랜 세월을 함께한 배에 대한 깊은 애정과 신뢰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는 배를 믿고 배는 그의 몸짓에 응답한다. 말없이 이어진 호흡이 둘 사이를 단단히 묶고 있다.
요즘 바다에서 '때배'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가볍고 단단한 동력 어선이 그 자리를 대신하면서 사람들은 위험하다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배라며 고개를 젓는다. 아직도 그런 배를 타느냐는 걱정과 비웃음 섞인 시선도 따라붙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오랜 세월 함께해 온 이 배와 전통 어법이야말로 자신의 삶을 지탱해 준 근간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때배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바다의 흐름에 몸을 맡기며 자연을 읽어 온 삶의 방식 그 자체다. 그가 걸어온 시간과 기억이 고스란히 담긴 자리이기도 하다. 오늘도 그는 때배 위에서 낫대를 쥔 채 파도와 함께 흘러가는 시간을 이어간다.
▲ 때배와 창경, 낫대
정상록 어부가 오동나무와 대나무를 활용해 제작한 도구들
ⓒ 진재중
세월과 바다를 견디며 이어온 위험한 전통 작업
"이 뗏목과 나는 함께 늙었어."
담담하게 건넨 한마디에는 평생 바다 위에서 쌓아온 시간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정상록 어부는 기계보다 몸으로 익힌 감각에 의지해 물살과 계절의 변화를 읽으며 살아왔다. 그에게 바다는 단순한 생업이 아니라 삶 그 자체다. 하지만 그 삶은 언제나 위험과 맞닿아 있다.
"쉽게 보이지만 가장 위험한 일이지. 몇 번이나 죽을 뻔했어."
긴 한숨 끝에 이어진 말은 어부로 살아온 세월의 무게를 짐작하게 한다. 긴 낫대로 깊은 바다를 더듬다 한순간 균형을 잃으면 곧바로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여러 차례 위기를 겪고도 그가 바다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다른 삶을 선택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바다는 그렇게 그의 전부가 되어 있었다.
그의 전통 어법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바다에 나서며 시작됐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중턱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바다를 삶으로 익혔고, 나무를 겹겹이 쌓아 만든 때배를 다루며 파도를 이기는 법을 배웠다. 이제 때배는 단순한 배가 아니라 그의 삶 그 자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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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과 함께 이어온 창경바리 어법으로 해산물을 채취하는 정상록 어부
ⓒ 진재중
사라지는 오동나무, 때배에 실린 전통의 시간
"때배는 말린 오동나무로 만들지. 예전에는 흔했는데 이제는 찾기 어려워. 바닷속 해조류가 줄어들 듯 육지에서도 나무가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까워."
정상록 어부의 말에는 바다와 뭍이 함께 변해 온 세월에 대한 깊은 아쉬움이 담겨 있다. 가볍고 부력이 좋은 오동나무를 여러 겹 이어 만든 때배는 한때 쉽게 만들 수 있었던 전통 나무배였지만, 재료가 귀해진 지금은 제작 자체가 어려운 일이 되었다.
때배와 짝을 이루는 대표적인 도구가 '창경'이다. 네모난 상자에 유리를 달아 바닷속을 직접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든 기구로, 때배 위에서 해산물의 위치를 확인하는 데 쓰인다. 냇가에서 다슬기를 잡을 때 사용하는 도구와 비슷한 원리다. 작은 나무배와 창경은 함께 사용되어 전통 방식의 바다 작업을 가능하게 해 온 필수 어구다. 때배에서 창경, 낫대를 이용해 해산물을 채취하는 어법이 창경바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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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을 보면서 해산물의 위치를 찾는 정상록 어부
ⓒ 진재중
바다와 삶을 잇는 마지막 약속, 전통 어법의 계승
"좀 있으면 일년 중 가장 바쁜 철이지."
아카시아 꽃이 피기 시작하면 정상록 어부의 하루도 함께 분주해진다. 제철을 맞은 미역을 거두는 시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때가 되면 전국 각지에서 주문이 밀려들고,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는 그의 손길을 재촉한다. 그 소리는 단순한 생계를 위한 신호가 아니다. 오랜 세월 한결같이 바다를 지켜온 시간 그리고 그가 쌓아온 신뢰와 약속의 무게를 다시금 일깨우는 계절의 알림이다.
고된 시절에도 변함없이 주문을 보내준 이들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전통을 자신의 대에서 끊을 수 없다는 책임감이 그를 다시 바다로 이끈다. 노를 잡는 순간, 일은 곧 삶이 된다. 그는 끝까지 때배를 타고 창경바리 어법을 지키겠다고 담담히 말한다.
때배가 사라지면 어부로서의 삶 또한 함께 희미해질 것이라는 그의 말에는 오랜 시간이 켜켜이 스며 있다. 오늘도 바다 위에 떠 있는 한 척의 때배는, 자연과 사람이 함께 호흡하던 시간을 조용히 증언하고 있다.
2025년, 그의 창경바리 어법은 어촌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며 사라질 위기에 놓였던 전통의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는 제도적 지원만으로 전통이 이어질 수는 없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뒤를 이을 사람, 바다를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일 후계자다. 때배와 창경바리는 단순한 도구와 기술이 아니라 자연과 사람이 맺어온 오래된 관계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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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떠오르기 전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바다로 나서는 정상록 어부. 그는 창경바리라는 전통 어법이 점점 사라져 가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오늘도 그 맥을 잇기 위해 묵묵히 노를 저어 나간다.
ⓒ 진재중
바다와 사람의 조용한 동행
네모난 유리상자와 긴 장대를 들고 바닷속을 들여다보는 그의 뒷모습에는 노동을 넘어선 삶의 태도가 배어 있다. 거센 물살과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하루의 물길을 이어간다. 물결 위에 선 그의 발끝에는 한 시대의 기억과 전통이 함께 얹혀 있다. 수없이 노를 저으며 파도와 맞섰던 세월은 고단했지만, 그 시간이 경험과 지혜로 쌓여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그의 모습은 이제 점차 사라져가는 동해안 전통 어업의 상징 같은 장면이 되었다. 바람의 결을 읽고 물살을 헤아리며 이어온 삶. 그러나 그 방식을 이어받을 이가 없다면, 오래된 기술과 기억 또한 서서히 물빛 속으로 스며들지 모른다.
인터뷰 중 그는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해산물은 바다가 길러도 거두는 일은 결국 사람의 몫이지, 이 일을 놓는 순간 전통도 함께 끝날 것 같아 쉽게 물러설 수 없어."
그 말에는 평생 바다와 함께한 어부만의 책임감과 애정이 담겨 있었다.
네모난 유리상자와 긴 장대를 들고 물속을 살피는 그의 뒷모습에는 생업을 넘어선 자부심이 배어 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그는 흔들림 없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한 시대의 기억을 오늘의 바다 위에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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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록 어부가 창경바리를 다루며 바다 위에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 진재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