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터카 타고 유럽] 고성과 대학의 도시, 하이델베르크
3월 1일부터 9일까지 중부 유럽을 다녀왔습니다. 이번 여행은 대중교통 대신 렌터카를 선택해 다양한 지역을 달렸습니다. 여정 중 만난 인상적인 풍경과 이색적인 장소들을 소개합니다. <기자말>
짧은 룩셈부르크 여행을 마치고 약 3시간을 달려 독일 하이델베르크로 향했다. 이번 렌터카 여행의 코스는 다소 비효율적이었지만, 독일 여행만 계획한다면 하이델베르크는 첫 방문지로 충분히 고려할 만한 도시다. 독일의 관문 프랑크푸르트에서도 자동차나 대중교통으로 한 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이델베르크는 '고성(古城)의 도시', '대학의 도시'로 잘 알려져 있다. 이곳의 상징 하이델베르크성(Schloss Heidelberg)으로 먼저 향했다. 성으로 오르는 푸니쿨라 매표소 건물에는 대형 공영주차장(Parkhaus Kornmarkt/Schloss)이 있어 차량을 주차한 뒤 이동하기 편리하다. 24시간 주차료는 20.5유로, 주요 관광지까지도 도보로 10~15분이면 충분하다. 하이델베르크 시내 숙소 대부분 주차 공간이 넉넉하지 않은 만큼 이곳을 이용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폐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하이델베르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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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성, 수차례 전쟁을 겪으며 많은 곳이 파괴되었다
ⓒ 최한결
푸니쿨라를 이용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걸어서 성으로 올라갔다. 천천히 걸으며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바라본 성은 웅장한 모습이었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파괴된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화려함과 동시에 폐허 같은 쓸쓸함이 공존하는 모습이었다.
하이델베르크성은 13세기에 지어졌다고 전해진다. 이후 신성로마제국 시기 이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 팔츠 선제후들의 거주지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7세기 유럽을 휩쓴 30년 전쟁과 연이은 프랑스군의 침공으로 성은 크게 파괴되었다.
성을 복구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번개로 인한 화재까지 겹치며 완전히 복원되지 못했다. 겉으로 보기에 건물 대부분이 멀쩡해 보이지만, 막상 다가가면 외벽만 얇게 남아있다. 그 결과 하이델베르크성은 지금과 같은 독특한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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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성에서 바라본 하이델베르크 구시가지
ⓒ 최한결
성 내부는 일부 구간만 개방되어 있지만 뒤쪽 테라스로 나가면 하이델베르크 시내 전경이 한 눈에 펼쳐진다. 네카어강을 따라 이어진 붉은 지붕의 건물들, 도시가 한눈에 들어오며 탁 트인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다.
성 지하에는 커다란 와인통(Heidelberger Tun)이 자리하고 있다. 한 번에 22만리터 이상의 와인을 저장할 수 있는데, 과거 팔츠 선제후들이 세금으로 거둔 와인을 보관하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한다.
와인통 앞에는 우스꽝스럽게 생긴 목조 조각이 있다. 18세기 하이델베르크성에서 와인 저장고를 관리하던 난쟁이 페르케오(Perkeo)다. 그는 와인을 마시겠냐는 질문에 늘 "Perché no?(왜 안 되겠어?)"라고 이탈리아어로 답했다고 한다. 그만큼 엄청난 주량을 자랑하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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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성의 거대한 와인통과, 와인통을 지키는 페르케오 상
ⓒ 최한결
전설에 따르면 그는 평생 물 대신 와인을 마시며 80세까지 장수했다. 그러다 어느 날 건강에 좋지 않으니 물을 마시라는 의사의 권유로 와인을 끊었고,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페르케오는 하이델베르크의 커다란 와인통과 함께 이곳을 지키는 상징처럼 남아있다.
한편 하이델베르크성 한 켠 오토 하인리히관에는 독일 약국 박물관이 위치해있다. 이곳에서는 중세부터 근대까지 이어진 유럽 약학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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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약국의 모습을 재현해놓은 전시. 천장엔 '힘'을 상징하는 악어가 매달려있다. 평소 보기 힘든 생물을 갖다 놓는 약국일수록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 최한결
특히 과거 약국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놓은 전시가 인상적이었다. 유니콘의 뿔로 둔갑한 일각고래의 뿔, 강함의 상징으로 사용되던 악어 표본 등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약학과 미신 경계에서 병을 치료하고 있었다.
하이델베르크성 관람을 마치고 정원이 있는 후문 쪽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성벽을 따라 내려가는 길은 정문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관광객이 많지 않아 한층 더 고요했고, 그 분위기가 하이델베르크성 특유의 폐허 같은 모습과 어우러져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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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마르크트광장에서 바라본 하이델베르크성
ⓒ 최한결
길을 따라 내려와 콘마르크트(Kornmarkt) 광장에 닿았다. 1700년대 만들어진 왕관을 쓴 성모 마리아상이 서 있고 그 뒤로 하이델베르크성이 늠름하게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크 트웨인은 저서 <유럽 방랑기>에서 "하이델베르크성은 폭풍에 시달려 왕관을 잃은 폐허가 되었지만, 여전히 왕처럼 위엄있고 아름답다"라고 표현했다. 콘마르크트 광장에서 바라본 성은 그 문장 그대로였다.
헤겔과 하이데거가 걸은 철학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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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의 원숭이상, 원숭이상 옆으로 "왜 나를 보느냐"라는 문구가 적혀있고, 쥐도 있다.
ⓒ 최한결
하이델베르크성을 내려와 강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칼 테오도르 다리(Carl Theodor Alte Brücke)로 걸었다. 다리 앞에는 유명한 원숭이상(Brückenaffe)이 서 있다.
이 원숭이상은 거울을 들고 있는 독특한 모습이다. 원숭이상 옆에는 17세기 쓰여진 시 한 구절이 적혀있다. "왜 나를 쳐다보는가? 주위를 둘러보면 나 같은 원숭이는 더 많을 텐데" 이 문구는 스스로부터 돌아보라는 풍자와 겸손의 의미를 담고 있다.
또 다른 재미있는 점은 원숭이상을 만지는 위치마다 의미가 다르다는 점이다. 거울을 만지면 다시 이곳을 찾게 되고 손을 만지면 행운이, 옆에 있는 작은 쥐를 만지면 부가 찾아온다고 한다. 특히 원숭이 가면에 얼굴을 직접 넣어볼 수도 있는데 이렇게 하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물론 스스로 원숭이가 되어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는 의미로도 읽힌다. 재밌으면서도 풍자적인, 묘한 질문을 던지는 동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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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성, 사랑의 자물쇠, 다리에 걸터앉아 맥주를 마시는 청년들
ⓒ 최한결
다리를 건너다 보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강변에서 맥주를 마시는 청년들, 다리의 좁은 틈에 빽빽히 자리 잡은 사랑의 자물쇠들.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강을 건너 철학자의 길(Philosophenweg)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이델베르크에 머무르는 1박 2일 동안 저녁과 아침에 한 번씩 이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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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길, 사색에 잠길 수 밖에 없는 분위기다
ⓒ 최한결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들과 철학자들이 사색을 즐겼던 산책로, 헤겔과 하이데거 등이 걸었다고 전해진다. 다만 때때로 칸트가 이곳을 걸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그는 평생 쾨니히스베르크를 벗어나지 않은 인물이다. '철학자의 길'이라는 이름이 주는 이미지 때문에 생긴 오해다.
이날 오르기 시작한 구간은 길이 구불구불해 '뱀의 길'로 불리는 곳이었다. 양옆으로는 키보다 높은 벽돌 돌담이 이어져 있고, 초록빛 이끼가 군데군데 끼어있었다. 길은 두 명이 간신히 비켜갈 정도로 좁았다. 오르는 내내 새 소리가 귀를 간질였고, 자연스레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다만 길이 생각보다 가팔라 "철학자가 되기 위한 기본은 체력인가"라는 엉뚱한 생각도 잠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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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산책 중, 철학자의 길에서 바라본 하이델베르크 성. 붉게 빛나고 있다.
ⓒ 최한결
언덕 위로 이어진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네카어강 건너편으로 구시가지와 하이델베르크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해 질 녘에는 붉게 물든 하늘 아래, 하이델베르크성의 붉은 벽이 마지막을 불태우는 듯 더욱 선명하게 빛나며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어낸다.
아침에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강 위에는 고요하게 안개가 깔려 있었고 적막함이 공기를 덮었다. 20분 정도 산책을 이어가자, 하이델베르크성 뒤편에서 힘차게 떠오르는 햇빛이 도시를 서서히 비추며 전혀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같은 장소였지만 전혀 다른 두 장면이었다. 철학자들이 왜 이 길을 오가며 다양한 사색에 잠겼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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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철학자의 길에서 바라본 하이델베르크성
ⓒ 최한결
도시 전체가 하나의 대학, 그리고 낭만
철학자의 길에서 신시가지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은 조용한 주택가로 이어진다. 고급 주택들이 모여있는 부촌으로, 실제로 대학 교수나 석학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라고 한다.
그러던 중 재미난 건물을 하나 발견했다. 겉보기엔 평범한 주택처럼 보이는데 문 앞에 '물리학부 도서관'이라는 표지판이 붙어있었다. '대학의 도시'라는 명성답게 대학 건물이 도시 곳곳에 흩어져 있다는 것이 실감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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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구시가지에 위치한 대학 건물을 알려주는 지도(좌), 도시 곳곳에 알아차리지도 못하게 대학 건물이 곳곳에 있다(가운데,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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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하이델베르크는 도시 전체가 하나의 대학이나 마찬가지다. 1386년에 설립된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그만큼 도시 전반에 깊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동시에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젊은이들이 끊임없이 모여들며 활기가 흐른다.
성의 폐허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경, 사색에 잠길 수밖에 없는 철학자의 길의 고요함, 그 속에 공존하는 젊음까지. 하이델베르크는 서로 다른 시간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도시였다.
괴테는 이곳에서 한때 뜨거운 사랑에 빠졌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하이델베르크를 수시로 오가며 "독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이곳을 걷다 보면 누구나 생각에 잠겨 조금은 더 낭만적인 사람이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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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카어강에서 맞이한 일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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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질 녘의 하이델베르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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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마르크트광장과 하이델베르크성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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