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사적지 지정된 '장흥의 심장' 장흥읍 행정복지센터 앞 칠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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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장흥군 장흥읍 칠거리. 지역 정체성의 상징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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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마다 기억 속 만남의 장소가 있다. 건물이나 건물 앞일 수 있고, 거리일 수도 있다. 소통의 공간이다. 개인과 개인이 만나 헤어지고, 여럿이 한데 모였다가 흩어지기도 했다. 스마트폰은 생각하지 못했고, 대중교통도 불편한 시절의 얘기다.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에 칠거리가 있다. 읍내 길은 모두 일곱 갈래 칠거리로 통했다. 자연스레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었다. 장날이면 인근 마을 사람은 물론 외지 상인들도 칠거리를 거쳐 시장으로 갔다. 술집과 여관, 의원과 약방도 여기에 있었다. 경찰서와 법원도 가까웠다.
칠거리에는 지역 정보가 다 모였다. 마을 소식이 스며들고 혼사, 상례 등 대소사도 논의됐다. 농사 정보와 농산물 시세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정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장흥 경제와 문화, 사회의 중심이 칠거리였다.
이뿐 아니다. 칠거리는 장흥 사람들의 공간적 기준이 됐다. '칠거리 근처', '칠거리 지나서' 같은 표현이 일상으로 쓰였다. 장흥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에게 칠거리는 어린 시절 추억과 직결됐다. 칠거리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대화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장흥과 칠거리는 떼려야 뗄 수 없다. 칠거리는 장흥 사람들 마음의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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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거리 앞으로 흐르는 탐진강변 풍경. 장흥사람들은 ‘예양강’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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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 칠거리에서 가까운 석대들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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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거리는 역사의 아픔도 함께했다. 1894년 석대들에서 쓰러진 수많은 동학혁명군을 기억하고 있다. 1908년 항일 의병의 장흥경찰서와 장흥헌병부대 습격도 지켜봤다. 일제강점기 장흥지청과 장흥경찰서에서 들려온 신음과 통곡 소리도 들었다. 사람들이 모여 독립 만세를 외치고, 광복의 기쁨을 함께 나눈 곳도 칠거리였다.
칠거리는 단순한 교차로나 길목이 아니다. 장흥 사람들 생활은 물론 일상의 기억이 새겨진 곳이다. 장흥 사람들 희로애락과 지역 정체성의 상징이 됐다.
칠거리가 장흥 민주화운동의 중심이 된 건 당연했다. 장흥읍의 가온누리이고, 재래시장도 여기에 있었다.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오갔다. '장흥의 심장', '장흥의 명동'으로 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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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고등학교. 1980년 5월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행진이 시작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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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1일 오후 강진에서 차를 타고 온 시위대가 장흥 칠거리에 도착했다. 시위 차량은 칠거리에서 장흥서초등학교 앞까지 이어졌다. 시위대는 광주참상을 전하며 장흥군민의 동참을 호소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광주 소식을 알고 있던 군민들은 손뼉을 치며 반겼다. 자연스레 주민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장흥 청년들이 금세 광우교통 버스 2대를 몰고 나타났다. 버스는 군민을 태우고 관산, 대덕을 돌아 보성군청 앞까지 달렸다. 청년들은 가는 곳마다 시위 참여를 독려했다.
같은 날, 장흥고등학교 학생들도 교문을 나섰다. 교련복을 입은 학생들은 줄을 지어 장흥군청 앞을 거쳐 장흥교를 건넜다. 탐진강을 가로질러 놓인 장흥교는 길이 196미터의 철근콘크리트 다리였다.
학생들은 읍사무소 앞 칠거리와 장흥경찰서 앞을 행진하며 거리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전두환 퇴진', '김대중 석방'을 외쳤다. 학생들이 장흥읍사무소 앞에 이르자, 칠거리가 학생과 주민으로 가득 찼다.
학생들의 시위는 학교 교사의 지도와 감독 아래 질서있게 진행됐다. 거리 행진을 마친 학생들은 장흥군청과 장흥초등학교 인근에서 자진 해산했다. 경찰과의 충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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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읍 행정복지센터와 칠거리. 장흥사람들의 기억 공간이다. 5.18사적지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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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련복을 입고, 선생님들이 대오에서 이탈하지 못하도록 지도하면서 거리 행진을 했어요. 당시는 3학년이 9반까지 있었죠. 500명 정도. 제가 54번이었으니까 한 반에 60번까지 있었네요. 그러면 1, 2, 3학년까지 하면 1000명이 훨씬 넘는 수가 참석한 것 같습니다."
당시 장흥고 3학년 이경호 씨의 구술이다.
학생들의 시위는 한 교사의 제안으로 시작됐으며, 학생들의 의견 수렴을 거쳐 이뤄졌다. 학교는 시위 이튿날부터 휴교에 들어갔다.
장흥 민주화운동은 읍내 전역으로 확산됐다. 장흥군청 앞 주유소에선 시위 차량에 무상 주유로 화답했다. 무상 주유는 칠거리 일대에서도 이뤄졌다. 인근 상가에선 시위대에 음료수를, 주민들은 주먹밥을 건네며 응원했다.
일부 청년들은 억불산 자락 무기고 접수를 계획했다. 무기를 들고 광주로 가자는 것이었다. 중장년들이 말렸다. 청년들이 수긍했다. 일부 청년들은 맨몸이라도 가겠다며 차를 타고 광주로 향했다. 하지만 중간에 막혀 광주로 들어가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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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읍 행정복지센터. 장흥읍내 칠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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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에서 살고 있는 한승원 작가의 '칠거리 연가' 시비. 장흥읍 행정복지센터 옆 강변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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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사람들에게 5·18 민주화운동은 광주와 함께 겪은 큰 아픔으로 남아 있다. 아픔은 민주와 인권의 가치를 되새기는 소중한 자원이 됐다.
장흥군민들이 한데 모여 민주주의를 외친 칠거리 장흥읍 행정복지센터 앞이 최근 5·18 전남사적지로 지정됐다. 5·18 전남사적지도 목포·나주·화순·강진·해남·영암·무안·함평을 포함해 모두 9개 시군 30곳으로 늘었다.
칠거리는 그사이 많이 달라졌다. 행정복지센터 옆 탐진강변에 한승원 작가의 '칠거리 연가' 시비가 세워졌다. 정보가 모이던 소통공간은 군청 앞 중앙로에 자리를 내어줬다. 날마다 떠들썩하던 거리도 침묵에 빠져들었다. 칠거리가 예전보다 야위어 보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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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토요시장. 예양강변에서 칠거리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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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