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썼으면 고쳐야지] 읽을 만한 문장으로 고치기
시민기자가 쓴 글을 매일 고치고 다듬는 사람의 이야기. 인공지능(AI)이 쓰고 고치는 시대에, 인간이 쓰고 고치는 마음을 찬찬히 담아 봅니다. <기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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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AI)을 활용해 만든 이미지.
ⓒ 오마이뉴스
편집기자로 일하는 동안 '퇴고'라는 단어의 뜻을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퇴고는 퇴고니까. 고치고 다듬는 것, 그게 전부라고 생각했다. 오은 시인의 <뭐 어때>를 읽기 전까지는 말이다.
퇴고의 뜻을 알게 되니
말을 허투루 듣지 않는 사람, 들은 것을 반드시 확인해 보는 사람, 찾아보는 사람. 찾아볼 수 있는 여유가 있음을 기쁘게 생각하는 사람. 아는 단어에서도 다름을, 혹은 새로움을 발견하는 사람. 모르는 단어에서는 새로운 앎을 발견하는 사람.
이것은 내가 그의 책을 읽으면서 '시인 오은'에 대해 든 생각을 메모해 둔 것이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일상에서 접하는 말과 글을 잘 포착해 이야기를 지어내는 그를 본받고 싶어서다. 그러다가 그의 문장 "읽을 만한 글을 쓰는 사람은 쓸 만한 사람일까?"라는 부분에서, '읽을 만한 글'이라는 데 시선이 꽂혔다. 내가 하는 일과 관련 있는 것 같아서다.
나는 매일 글 안에서 '읽을 만한 문장'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고치고, '읽힐 만한 문장'으로 제목을 뽑는다. 여기서 나에게 '읽을 만한 문장'이란 '퇴고가 잘 된 문장'이다. 그런데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퇴고는 한자어일 텐데, 무슨 뜻을 가지고 있을까. 갑자기 난생처음 보는 단어를 마주한 듯, 낯선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 뜻을 찾아보았다. 오은 시인이 글을 쓸 때 그러는 것처럼.
찾아보니 '퇴고'는 한자어로 '밀 퇴'에 '두드릴 고'를 썼다. 내가 짐작했던 '고친다'는 뜻의 한자는 아예 없었다. 그런데도 퇴고를 고치고 다듬는다는 말로 의심 없이 써왔다. 어째서지? 그 이유를 알려면 이 중국 일화(네이버 지식백과 참고)를 알아야 한다.
당나라 시인 가도가 말을 타고 가다 좋은 시가 떠올랐다.
조숙지변수(鳥宿池邊樹) / 새는 못속의 나무에 깃들고
승퇴월하문(僧推月下門) / 스님이 달 아래로 물을 밀친다
가도는 결구에 나오는 '퇴' 자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밀 퇴(推)'가 나을까, '두드릴 고(敲)'가 나을까.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한참을 고심하던 가도는 그만 고관의 행차와 부딪히고 만다. 그 고관의 이름은 한유. 가도가 사과하며 길을 피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자 당송팔대가 중 한 사람이었던 한유는 생각에 빠진다. 한유 역시 대문장가였기 때문이다. 가던 길을 멈춘 한유는 가도와 토론 끝에 '고(敲)' 자가 더 어울린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이후 '퇴고(推敲)'라는 고사가 생겼다는 것.
오래 글을 고치는 일을 했으면서 퇴고라는 말의 출처를 몰랐다는 게 민망했다. 배움에 늦은 때란 없다고 했으니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지. 그런데 내가 이 고사에서 얻은 소득은 따로 있었다. 바로 가도와 한유가 '글벗'이 되었다는 거다.
나 역시 그런 인연들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글로 만난 사람들. 서로가 서로에게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는. 글을 쓰며 성장하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는. 쓰고 있을 때나 쓰지 않을 때도 자극이 되는. 존재만으로 동지애가 생기는.
서로 등을 두드려주는 건강한 관계
글로 알게 된 이들과는 처음 만나 이야기해도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편했다. 내 안에 있는 말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상대도 그랬다. 왜 그럴까. 비슷한 질문을 상대에게 건넨 적이 있는데 그때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쓴 글을 오래 봐 왔으니 나라는 사람의 세계를 알고 있기 때문 아니겠냐고. 그래서 자신도 마음을 열고 대화를 하게 되는 것 같다고. 자연스럽게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라 했던 정현종 시인의 시 '방문객'이 떠올랐다.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라던.
내가 일하는 곳은 글 쓰는 사람들이 매일 찾아오는 곳. 그 어마어마한 만남의 한가운데서 20년 넘게 일하고 있다는 게 가끔은 참 신기하다. 그들의 첫 독자가 나라는 사실도. 앞선 고사에 빗대자면 나도 때로는 한유 같은, 때로는 가도 같은 사람이지 않을까? 내 의견이 상대에게 도움을 줄 때도 있지만, 그런 과정에서 나 역시 상대에서 배우는 경우도 적지 않기에 그렇다.
지난해인가. 상대를 지목해서 함께 출연하는 음악 프로그램 <라이브 와이어>에서 가수 소수빈에게 지목당한 크러쉬가 끝인사로 한 말이 기억에 남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저는 사실 음악으로 대화하는 게 가장 서로가 이해하기 쉬운 방향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서로 연결되고, 커넥팅 되고. 그래서 (지금) 기분이 너무 좋아요. 오늘은 아주 잘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행복하게."
나도 그랬다. 글 쓰는 사람들과는 무슨 말을 해도 이해 받는 기분이었다. "나도 그런데"라는 말이 자동으로 나왔다. 상대도 내가 하는 말에 귀 기울였다. 글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많지 않아서 일까. 그들은 쓰기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표정은 늘 웃고 있었다. 그들의 들숨과 날숨에서 기쁨, 보람, 만족감이 느껴졌다. 어떻게든 포기하지 않고 계속 쓰고 싶다는 열정이 보였다.
그런 만남이 있던 날은 나도 크러쉬처럼 커넥팅 된 듯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나 역시 그들처럼 계속 글을 쓰고 싶어졌다. 함께 간다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은 에너지는 또 좋은 에너지를 만드는 법이니까. 서로의 등을 두드려주는, 이 건강한 관계를 오래 붙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