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라이프

사람을 놀라 죽게 할 만큼 치명적인 향기의 차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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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만의 '번개', 봄을 뚫고 도착한 다실에서의 신선놀음

바쁜 일상 속, 차 한 잔으로 일상에 쉼표를 찍습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24절기와 동양화를 오가며 흐르는 시간의 아름다움을 기록합니다. <기자말>

살다 보면 그저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 성사되는 만남이 있기 마련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이런 기분 좋은 돌발 상황을 '번개'라고 부르죠. 그런데 그 번개를 친 사람이 무려 7년 만에 연락이 닿은 인연이라면 어떨까요? 그럴 땐 열 일 다 제쳐두고 일단 "고(Go)!"를 외치며 나서는 것이 인지상정 아닐까요. 약속 장소까지 무려 4대의 버스를 타야 하는 먼 길이라 할지라도 말이죠.

다행히 가는 길은 지루할 틈이 없었습니다. 창밖으로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봄바람에 꽃잎이 흩날리고, 연둣빛 부드러운 녹색 기운이 햇살에 반사된 모습은 찬란함 그 자체였습니다. 7년이라는 공백을 단숨에 뛰어넘을 기대감과 함께 봄의 한가운데를 뚫고 도착한 곳은, 제가 난생처음으로 발을 들여본 지인의 다실이었습니다.

많은 차를 마실 때는 속을 든든히 해주는 티푸드가 필수다. 차 맛을 방해하지 않는 담백한 견과류와 요즘 유행한다는 버터떡으르 곁들여봤다.

ⓒ 노시은

7년 만의 만남에 반가움도 잠시. 궁금했던 다실의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저는 그만 자리에 우뚝 멈춰 서고 말았습니다. 사방을 꽉 채운 엄청난 수의 자사호(紫砂壺)와 차호들, 그리고 공간에 켜켜이 배어 있는 묵직한 차향에 완전히 압도당했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섣불리 움직였다가 옷자락에 스쳐 저 귀한 기물들 중 하나라도 깨지면 어쩌나 하는 아찔함에 저절로 몸가짐이 조심스러워지더군요. 맸던 배낭을 공손히 내려놓고 외투도 바깥에 벗어둔 뒤에야, 기물들의 숲 사이를 지나 조심스레 착석할 수 있었습니다.

심사정, 송하음다도(松下飮茶圖) 18세기, 지본담채 28.3 X 55cm 삼성미술관 리움

ⓒ 위키미디어공용

차실에 미리 와 있던 손님에게 인사를 건네며 자리에 앉으니 문득 심사정의 <송하음다도(松下飮茶圖)>가 떠올랐습니다. 깊은 산속, 소나무 그늘에서 평온하게 차를 마시는 선비의 모습을 담은 그림 말입니다. 번잡한 일상을 떠나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며 찾아온 이 은밀하고도 고요한 다실은, 그림 속 선비가 찾아든 깊은 산속 소나무 아래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물 끓는 낮은 소리를 병풍 삼아 찻잔을 마주하고 앉은 우리는 어느새 속세를 벗어난 신선이 되어 있었습니다.

귀한 잔에 갓 피어난 봄을 담아

중국 10대 명차 중 하나로, 강소성 동정산(洞庭山)에서 난다. 만들어진 차 잎이 소라 고동 같고 잎에는 솜털이 빽빽하다. 청명 전에 딴 찻잎으로 만든 귀한 차를 맛볼 수 있어서 기뻤다.

ⓒ 노시은

이어진 찻자리에서는 다양한 차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화려한 라인업의 포문을 연 것은, 사람을 놀라 죽게 할 만큼 치명적인 향기를 품었다 하여 '혁살인향(嚇煞人香)'이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으로 불리는 '벽라춘(碧螺春)'이었죠.

보송보송 여린 명전 벽라춘 찻잎을 한 김 식힌 뜨거운 물에 넣어 충격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우렸다.

ⓒ 노시은

청명(淸明) 전에 딴, 아주 여리고 솜털이 빽빽한 녹차 잎을 한 김 식힌 뜨거운 물 위로 우수수 떨어뜨립니다. 여린 잎들은 물을 만나 제 몸의 털을 떨구며 활짝 피어나니, 마치 잔 속에서 구름이 춤을 추는 듯했습니다.

벽라춘의 흰 솜털이 떠다니는 모습이 마치 구름이 춤추는 것 같다.

ⓒ 노시은

게다가 찻물을 따라 마신 잔이 무려 청나라 시대의 골동 잔이라니요! 파스텔 연둣빛 바탕에 쨍한 분홍 꽃과 나비가 내려앉은, 수백 년의 시간을 품은 잔이었습니다. 그 귀한 잔에 갓 피어난 봄을 담아 홀짝거리니 그저 이 호사가 벅차고 행복해졌습니다.

청나라 시대부터 무탈히 버티어 내 앞에 놓인 골동잔. 차 맛을 둥글게 다듬어 내어준다. 어쩌면 저렇게 예쁜 색깔을 낼 수 있었을까! 봄과 완전히 닮았다.

ⓒ 노시은

벽라춘은 본래 과일나무 사이에 차나무를 심어 찻잎에 과일 향이 스미게 한다죠. 이날 마신 차는 비파나무 사이에서 자란 것이라 하더군요. 어쩐지 신선한 찻잎 그 자체의 맑은 맛 속에 기분 좋은 단향이 숨어 있었습니다.

세 명이 둘러앉아 11가지 귀한 차를 마신 날. 한낮에 시작된 찻자리는 해가 다 진 다음에야 파했다. 정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던 신선놀음 같았던 찻자리.

ⓒ 노시은

벽라춘이 열어젖힌 봄의 향연 뒤로는 무이암차, 단총, 보이차 등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찻잎들이 줄줄이 등판했습니다. 7년이라는 밀린 시간은 찻물이 끓고 찻잎이 바뀔 때마다 쉼 없이 찻잔 속으로 녹아들었습니다. 나중에는 고금의 선율까지 흐르게 해두고, 어두워질 때까지 그야말로 도끼자루 썩는 줄도 모르고 신선놀음에 푹 빠져들었지요. 나중에 세어보니 무려 11가지의 차를 비워냈더군요.

좋은 차와 좋은 사람은 내 삶의 보약

김홍도, 초원시명도(蕉園試茗圖) 지본담채 28x37.8cm 간송미술관 소장

ⓒ 간송미술문화재단

그래서 떠오른 그림이 단원 김홍도의 <초원시명도(蕉園試茗圖)>였어요. 커다란 파초잎 아래서 동자가 쪼그려 앉아 화로에 찻물을 끓이고 있는데, 정작 차를 즐겨야 할 주인의 모습은 화폭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옆에 사슴 한 마리가 다소곳이 앉아 있는 걸 보면, 어쩌면 이 찻자리는 진짜 신선들의 모임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을 하게 되죠.

도대체 주인공은 어디로 갔을까 늘 궁금했는데, 이 신선놀음 같은 찻자리를 겪고 나니 그림 밖의 정황이 선명하게 그려집니다. 그림 속 주인공은 바로, 차를 마시며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아닐까요. 누구든 다실 주인이 정성껏 우려주는 차를 연거푸 마시며, 물 끓는 소리와 좋아하는 음악을 배경 삼아 서로의 지난 삶을 나눈 경험이 있다면 말이죠. 그 순간만큼은 우리 모두가 저 그림 속 찻자리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충분합니다.

찻잔의 뒷면에는 나비 한 마리가 나폴나폴 날아다닌다.

ⓒ 노시은

이날의 압도적인 호사는 혀끝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요즘 푹 빠져있는 겸재 정선의 그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찻자리에 함께했던 다른 손님께서 도록에서도 본 적 없는 겸재의 미공개 개인 소장 작품 사진을 직접 보여주셨거든요. 눈이 소복이 쌓인 고즈넉한 겨울 산사의 풍경이 담긴 수묵화였습니다.

봄꽃이 만발한 4월의 한가운데서, 청나라 시대의 잔으로 차를 홀짝이며 조선시대 화성(畵聖)이 그린 겨울 산사를 감상하는 기분이란! 과거와 현재, 봄과 겨울이 하나의 찻상 위로 기적처럼 교차하는 순간이었습니다.

11가지의 차로 몸과 마음을 씻어내고 나니, 7년이라는 물리적 시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습니다. 기운을 제대로 충전한 하루. 정말이지, 좋은 차와 좋은 사람은 그 어떤 영약보다도 나은 내 삶의 보약입니다. 다음 번개는 부디 7년씩이나 걸리지 않기를 바라며, 마지막에 마신 40년 훌쩍 넘은 노보이차의 달큰한 여운처럼 우리의 인연도 오래도록 짙고 깊어지기를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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