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운 4구역 발굴 미완료지에 무단 시추 감행
허민 청장 "명백한 현행법 위반, 심각한 우려"
세운 4구역 매장유산 발굴 현장에서 적발된 시추 모습
국가 행정 기관이 공기업의 무법적인 토목 행위를 경찰에 직접 형사 고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발굴조사를 마치지 않은 도심 유적지에, 공공 개발을 주도하는 시행사가 무단으로 중장비를 동원해 수십 미터 깊이의 구멍을 무더기로 뚫었기 때문이다.
국가유산청은 서울주택도시개발공사(SH공사)가 허가 없이 열한 곳에서 시추를 감행해 세운 4구역 매장유산 유존 지역의 현상을 심각하게 변경한 사실을 지난 11일 적발했다고 16일 밝혔다. 불법행위를 인지한 즉시 현장 실사를 벌이고, 이날 오전 관할인 서울 혜화경찰서에 SH공사를 고발했다.
허민 국가유산청장은 16일 오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언론 브리핑을 열고 "발굴조사 완료 조치가 내려지지 않은 세운 4구역 내에서 발생한 SH공사의 불법행위를 적발해 법적 조치를 취했다"고 밝혔다.
이종훈 국가유산청 역사유적정책관이 16일 오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언론 브리핑에서 SH공사의 불법행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세운 4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 부지는 2021년부터 발굴이 시작된 핵심 유적지다. 아직 SH공사의 발굴조사 완료 신고와 국가유산청장의 완료 조치 통보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법률적으로 유물이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매장유산 유존 지역' 상태를 유지한다. 현행 법령상 유존 지역 내에서 시추하려면, 사전에 당국의 검토를 거쳐 승인받은 뒤 조사기관의 참관 아래 진행해야 한다.
SH공사는 기습적으로 토목 작업을 밀어붙였다. 지난 11일부터 이틀간 유적지 한복판 열한 곳에서 직경 280㎜, 깊이 38m에 달하는 구멍을 무단으로 뚫었다. 어떠한 사전검토 절차도 거치지 않았으며, 조사기관 관계자의 참관 또한 부재했다. 해당 구역에서는 조선 시대 동서 배수로, 이문 등 주요 유구가 출토된 바 있다.
이종훈 국가유산청 역사유적정책관은 "천공 작업을 하려면 사전에 국가유산청과 협의하고, 적어도 발굴 조사기관이 입회해야 한다"며 "현재 7.5m 규모의 유구가 그대로 남아 있는 상황이라 보존을 위해 더욱 조심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허 청장도 "38m 깊이로 무단 굴착을 하는 행위는 지하 유구에 직간접적으로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세운 4구역 매장유산 유존 지역 내 시추 현장을 찾은 국가유산청 관계자들.
국가유산청은 11일 SH공사와 관할 지자체인 서울시에 위반사항을 고지하고 추가적인 현상 변경 행위 중단을 유선으로 통보했다. 12일 고발 조치 예정 공문을 발송하고, 13일 오전 유적발굴 기관 담당자들과 함께 현장에 진입해 대대적인 조사를 벌였다. 이 정책관은 "시추한 열한 시점에서 명백한 위반 소지를 확인했다"며 "모든 현상 변경 행위를 중단하도록 명령하고 반입된 중장비도 즉각 철수시켰다"고 설명했다.
국가유산청은 이번 사태를 매장유산법 제31조 제2항을 위반한 중대 범죄로 규정한다. 해당 조항에 따르면, 이미 확인되었거나 발굴 중인 매장유산의 현상을 변경한 자, 또는 발굴 정지나 중지 명령을 위반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이나 1억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허 청장은 "발굴조사 완료 조치가 되지도 않은 땅에서 토목 공사용 시추를 감행하는 것은 명백한 현행법 위반"이라며 "이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공기업과 감독 기관인 서울시가 이런 행위를 벌인 것에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