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 현판 전통으로 본 병기 방식의 역설
AR·미디어 파사드를 대안으로
"먹의 시대 넘어 빛의 시대로" 파격 제언
광화문 현판
지난달 31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 '광화문 현판 토론회'에서는 한글 현판 추가의 취지에 공감하면서도, 현재 논의되는 방식이 오히려 한글의 가치를 격하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강민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는 "한자 현판 아래 한글 현판을 덧붙이는 것은 단순한 발음기호 표기에 불과하며, 한글의 주체적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전근대 건축에서 현판이 차지하는 위상부터 짚었다. 한문 문명권에서 건물 정면 처마 아래에 이름을 새긴 현판을 거는 행위는 건축 문법의 핵심이었다. 목조건축은 재료 특성상 수명이 한정적이지만, 그 위에 걸린 이름은 건물이 수백 년에 걸쳐 중건되고 교체되는 동안에도 변치 않아서다. 왕이 직접 글씨를 내려주는 '사액(賜額)'이 문명사적 의례로 기능했던 이유다.
그것이 꼭 하나일 필요는 없었다. 우리 건축에는 한 건물에 여러 현판을 거는 '다중 현판' 전통이 뿌리 깊다. 창경궁 통명전이나 덕수궁 석어당처럼 건물 정면과 대청 안쪽에 같은 이름의 현판을 중첩해 거는 방식이 있었고, 남계서원 풍영루처럼 전면에는 '풍영루', 후면에는 '준도문'을 달아 장소의 의미를 확장한 사례도 있었다. 전주 풍남문 후면의 '호남제일성' 현판도 같은 방식이다.
31일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 '광화문 현판 토론회'에서 한 참석자가 한글로 쓴 광화문 문구를 들고 있다. 연합뉴스
다중 현판은 건물의 위아래로도 이어졌다. 창덕궁 주합루(2층)와 규장각(1층)처럼 층마다 독립적인 현판을 달아 공간의 기능을 구분하거나, 감영 정문인 포정문 위 2층 누각에 관풍루(경상감영)·망월루(황해감영)라는 별개 명칭을 붙이기도 했다.
이 교수가 가장 주목한 건물은 부석사 안양루다. 안양문(1층 정면), 부석사(2층 정면), 안양루(2층 후면)라는 세 현판이 발걸음을 옮길수록 달라지는 공간의 성격을 단계적으로 드러낸다. 국보인 밀양 영남루도 '영남명루'와 '강좌웅부'라는 별개의 현판을 좌우에 달아 건축의 위용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다중 현판의 본질은 정보의 반복이 아니라 의미의 적층과 확장에 있다. 이 전통에 비추면 같은 명칭을 한자와 한글로 나란히 거는 방식은 선례를 찾기 어렵다. 자금성 한자·만주어 병기를 근거로 드는 주장에 대해 이 교수는 "만주어는 청나라 지배 계층의 공식 언어였으므로 이는 번역의 맥락"이라며 "'water' 옆에 '물'을 병기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말했다. 한자가 한국 문화의 엄연한 실체인 이상, 한글이 그것의 주석으로 기능하는 것은 오히려 한글을 종속적 위치에 놓는 일이라는 논리다.
31일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 '광화문 현판 토론회'에서 한 참석자가 한글로 쓴 광화문 문구를 들고 있다. 연합뉴스
그렇다고 한글의 자리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 교수는 현판이라는 형식 자체를 문제 삼았다. "현판은 표의문자인 한자의 운용 방식에 최적화된 전근대적 매체"라는 것이 그의 전제다. 한글이 미래 비전을 담으려 한다면 굳이 그 틀에 맞출 이유가 없다는 논리다.
증강현실(AR)을 활용한 가상 레이어링, 건축물 외벽을 매개로 한 미디어 파사드, 키네틱 구조물을 통한 가변적 정보 전달 등을 대안으로 제시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한글이 점유해야 할 공간은 나무판이 아니라 기술과 인문적 가치가 교차하는 지평이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한글은 '먹의 시대'를 넘어 '빛의 시대'를 대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