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내 미생물이 미주신경 손상시켜 인지기능 저하… 펜실베니아대 연구팀, 네이처에 발표
나이가 들수록 장내 미생물의 변화가 미주신경 기능을 저하시켜 뇌의 기억 중추인 해마에 악영향을 미치고, 이것이 인지기능 감퇴의 원인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나이가 들면 누구나 한 번쯤 "예전엔 이런 것도 잘 기억했는데"라는 말을 입에 올리게 된다. 우리는 이를 뇌세포가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여 왔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100세가 넘어도 정신이 또렷한 반면, 어떤 사람은 중년만 돼도 기억력이 눈에 띄게 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그 원인이 뇌가 아닌 '장'에 있을 수 있다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나왔다.
미국 펜실베니아대 연구팀은 노화에 따른 장내 미생물(마이크로바이옴)의 변화가 염증을 유발하고, 장과 뇌를 잇는 핵심 신경인 미주신경의 기능을 저하시켜 결국 인지 기능 감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연구는 세계적 권위의 국제 학술지 《네이처(Nature)》에 최근 게재됐다.
장과 뇌를 잇는 미주신경, 손상되면 인지기능 저하
우리 뇌는 눈·코·귀 같은 오감을 통해 외부 세계를 인식하는 동시에, 몸속 장기의 상태를 무의식적으로 감지하는 '내감각' 시스템도 갖추고 있다. 이 내감각의 핵심 통로가 바로 미주신경이다. 미주신경은 장·심장·폐 등 주요 장기와 뇌를 직접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연구팀은 쥐 실험을 통해 노화가 진행될수록 이 미주신경을 통한 장-뇌 신호 전달 기능이 약해지고, 이와 함께 기억력도 함께 떨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더 나아가 약물 등으로 늙은 쥐의 장 감각 신경세포를 인위적으로 자극하자, 미주신경이 다시 활성화되면서 인지 기능이 젊은 시절 수준으로 회복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범인은 특정 장내 세균…기억력 저하 경로 밝혀
그렇다면 무엇이 미주신경의 기능을 떨어트리는 것일까. 연구팀은 장내 미생물의 변화를 유력한 원인으로 지목했다. 실험에서 늙은 쥐의 장내 미생물을 젊은 쥐에게 이식하자, 젊은 쥐의 기억력이 늙은 쥐처럼 현저히 떨어졌다. 반대로 항생제를 투여해 장내 미생물을 억제하자 기억력이 다시 회복됐다.
연구팀은 기억력 저하를 유발하는 핵심 세균으로 '파라박테로이데스 골드스테이니(Parabacteroides goldsteinii)'를 지목했다. 이 세균이 만들어내는 특정 중쇄지방산(MCFA)이 장내 면역세포를 자극해 염증 신호를 만들고, 이 신호가 미주신경의 기능을 떨어뜨려 기억의 중추인 해마에까지 악영향을 미친다는 경로를 밝혀낸 것이다.
장 치료하면 기억력 회복된다
이번 연구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인지기능을 개선할 실마리가 나타났다는 점이다. 연구팀은 쥐 실험에서 특정 세균만 골라 제거하는 '박테리오파지' 바이러스를 이용해 원인균을 없애고 지방산 수치를 낮춰 기억력을 회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보다 더 빠르게 실현 가능한 접근법도 제시됐다. 비만 치료제 '오젬픽'과 유사한 약물(GLP-1 작용제) 등을 늙은 쥐에게 투여해 미주신경을 직접 자극했더니, 노화로 인한 기억력 감퇴가 극적으로 개선됐다. 이는 치료가 어려운 뇌를 직접 건드리는 대신, 비교적 접근이 쉬운 장내 환경을 바꾸거나 미주신경을 자극하는 것만으로도 노화 관련 기억력 저하를 되돌릴 수 있다는 새로운 희망을 보여준다.
물론 이번 연구는 아직 동물 실험 단계로 인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추가 임상 연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간질이나 뇌졸중 환자 치료에 사용되는 미주신경 자극술을 받은 환자들에게서 인지 기능 개선이 보고된 바 있어, 인간에게도 적용될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것이 연구팀의 의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