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상]
버지니아 로버츠 주프레 '노바디스 걸'
앤드루 마운트배튼 윈저(왼쪽부터)와 버지니아 로버트 주프레, 길레인 맥스웰. 2001년 3월 영국 런던의 맥스웰 자택에서 제프리 엡스타인이 일회용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이다. 주프레는 몇 시간 뒤 당시 영국 왕자였던 앤드루와 강제로 성관계를 갖는다.
"맥스웰 집 현관에서 몇 마디 나누는 동안 문득 생각했다. 앤드루 왕자처럼 유명한 사람을 만나고 사진도 안 찍는다면 엄마가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잠깐 실례하겠다며 방으로 달려가 코닥 일회용 카메라를 챙겨 왔고, 다시 돌아와 엡스타인에게 건넸다."(239쪽)
미국 금융계 억만장자 제프리 엡스타인이 연인이자 조력자인 길레인 맥스웰과 벌인 희대의 미성년자 성착취 사건은 미국 의회와 법무부의 사건 파일 공개와 연루된 거물 인사들의 잇따른 사회적 매장으로 다시 뜨거워졌다. 검찰과의 수상한 형량거래로 용케 중형을 피했던 엡스타인이 10여 년 만인 2019년 체포되자 감방에서 자살하고 공범 맥스웰은 이듬해 체포돼 징역 20년을 선고받은 일이 사건의 핵심 국면이었는데, 본진을 능가하는 규모의 여진이 닥친 형국이다.
사건 기록상 최소 199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엡스타인의 추악한 범행은 금권(金權)의 갑주로 오래 덮여 있었다. 오래전 여기에 작은 구멍을 내서 결국 산산이 부서지게 한 건 피해자 버지니아 로버트 주프레(1983~2025)가 회고록 '노바디스 걸'에서 언급한 사진이었다. 2001년 영국 런던의 맥스웰 집에서 앤드루 왕자와 강제로 관계를 갖기 직전 찍은 저 사진을, 주프레는 10년 뒤 영국 매체 데일리메일에 제공했다. 영국 왕실 서열 4위가 엡스타인에게 성접대를 받았다는 소문에 물증이 더해진 순간이었다.(엡스타인 본인이 찍은 사진이라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3일 영국 런던에서 한 활동가가 버킹엄 궁전 기념 정원의 이름을 '버지니아 주프레 추모 정원'으로 바꿔야 한다는 의미로 자체 제작한 표지판을 설치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지난해 10월 영어 원서가 나온 지 5개월 만에 한국어로 번역 출간된 '노바디스 걸'은 주프레의 자서전이자 엡스타인 사건 체험담이다. 총 4부로 구성돼 있다. 어머니의 방관 속에 친부와 그 친구에게 상습 성폭행을 당하며 자기 파괴적 일탈을 감행한 성장기가 1부에, 마음을 잡고 마러라고 리조트에 취직했다가 맥스웰의 눈에 띄어 엡스타인 소굴에 끌려 들어간 10대 후반기 3년(2000~2002)이 2부에 담겼다. 이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태국에서 만난 호주 남성과 가정을 꾸리고 세 자녀를 기르던 저자가 안온한 생활을 뒤로하고 가해자들을 단죄하고자 범행을 폭로하고 법정 투쟁을 펼친 과정은 3, 4부에 담겼다.
주프레가 고통스러운 범죄 피해 기록을 순탄치 않은 개인사와 긴밀히 연결하면서 이 책은 논픽션이면서도 심리소설, 범죄소설, 사회소설처럼 읽히는 다층적 텍스트가 됐다. 자신 또한 엡스타인이 맘에 들어할 만한 어린 여성을 유인하는 역할을 했다고 털어놓을 만큼 진솔한 고백은 서사에 풍부함을 더한다. 솔직함은 성적 피해 경험을 묘사하는 데도 예외가 아니다. 독자의 고통을 예감한 듯 저자는 이렇게 당부한다. "이 모든 이야기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는 걸 안다.(중략) 그래도 부디 읽기를 멈추지는 말아주길."(115쪽)
언론의 축약된 기사로만 엡스타인 사건을 접했던 독자라면 너무나 무도해 믿기지 않는 범죄 행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됐는지, 범죄를 실행시킨 내밀한 메커니즘은 무엇이었는지 실감하게 된다. 맥스웰이 왜 '애인'의 변태 성욕을 채워주는 포주 노릇을 기꺼이 떠맡았고, 백면서생 같던 유명 과학자들이 왜 엡스타인 파일에 다수 이름을 올리게 됐는지도 짐작된다. 저자는 성접대 장소였던 엡스타인의 여러 저택에 방마다 감시카메라가 설치돼 있었는데도 녹화 영상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다. 생전 엡스타인에겐 접대 대가를 받아낼 수 있는 무기였고, 지금은 그의 여죄를 낱낱이 밝힐 증거라는 얘기다.
폭로자들이 직면했던 비난, 그러니까 엡스타인 요구에 얼마간은 자발적으로 응했고 대가도 충분히 받지 않았느냐는 공격이 얼마나 무책임한지도 이 책은 아프게 보여준다. 저자는 "이 추악한 소아성애자의 세계가 내게 익숙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자문한다. 당시 남보다도 못한 부모의 학대에 시달렸던 그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엡스타인은 가장이었고 맥스웰은 안주인"이었다는 것. 이들이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제시하며 나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히" 했다는 것.(이상 188쪽)
이 책은 이제 '실패한 오디세이'로 남았다. 지난해 4월 주프레는 연초에 남편에게 폭행당했다고 폭로했고 그달 하순 스스로 생을 마쳤다. 가정폭력 피해를 공개하기에 앞서 출판 담당자에게 재작년 10월 집필을 마친 이 책을 출간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주프레는 좋아하는 가수의 발언이라며 "사랑이란 평생에 걸쳐 식탁으로 되돌아오는 일이다"라고 책에 적었는데, 그 자신에겐 너무 먼 길이었을까.
노바디스 걸·버지니아 로버츠 주프레 지음·김나연 옮김·은행나무 발행·656쪽·2만7,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