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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흥도가 단종 눈을 감겨줬다? 단종이 삼촌과 의기투합? 천만영화 '왕사남'의 역사 점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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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마지막 2년 배경 삼은 '왕과 사는 남자'

당시 역사 기술한 정사·야사와 비교해보니

조선 제6대 왕 단종의 마지막 나날을 다룬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누적 관객 1,000만 명을 돌파한 다음 날인 7일, 단종 유배지였던 강원 영월군 청령포에 들어가려는 여행객들이 긴 줄을 서고 있다. 뉴스1

'천만 영화' 대열에 합류한 '왕과 사는 남자'는 첫 화면에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가미하였음'이라 밝히고 시작한다. 관객들의 눈물샘을 터뜨리고 막을 내릴 땐 조선시대 역사서 '연려실기술' '현종실록' '국조인물고'에서 발췌한 문구를 차례로 보여주며 어떤 사료에 상상력을 덧붙였는지 밝힌다.

영화는 러닝타임 117분 동안 조선 제6대 임금이었다가 숙부(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단종의 생애 마지막 2년을 다룬다. 정확히는 사육신이 단종복위운동을 꾀하다가 발각된 1456년 6월부터, 단종이 숙부 금성대군이 주도한 복위운동 실패에 휘말려 유배지에서 열일곱에 승하한 이듬해 10월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이 시기를 다룬 정사(正史)로는 단연 단종실록과 세조실록을 꼽아야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두 편은 세계 기록문화의 진수로 불리는 조선왕조실록 안에서 '옥의 티'로 평가받는다. 쿠데타(1453년 계유정난)로 정권을 잡은 탓에 정통성이 취약했던 세조 대에 모두 집필되면서 축소·왜곡된 흔적이 역력하기 때문. 더구나 백성들이 오랫동안 울분과 애도를 담아 이 '왕실 막장극'을 입에 올린 통에 단종의 폐위와 죽음은 다양한 종류의 야사와 구전을 낳았다.

믿을 만한 사료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왕과 사는 남자'는 노산군으로 강등돼 강원 영월 벽지 청령포에 유배된 단종(박지훈)과, 단종에게 거처를 제공하고 감시하는 '보수주인' 역할을 맡은 마을촌장 엄흥도(유해진)를 앞세워 감동의 드라마를 빚었다. 영화 주요 대목에서 '사실'과 '상상력'이 어떻게 배합됐는지 따져봤다.

※이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①'단종과 브로맨스' 엄흥도 정체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연출한 장항준 감독이 관객 수 1,000만 명 달성을 기념해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최 장관이 7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게시한 사진이다. 뉴시스

엄흥도는 실존인물로 단종 승하 당시 영월군 호장(戶長)이었다. 호장은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아전) 조직의 우두머리. '광천골 촌장'이라는 영화 설정과는 차이가 있다.

엄흥도는 정사 조선왕조실록에서 20번가량 언급되는데 처음 등장하는 건 중종실록에서다. 조선 왕실이 단종 복권에 시동을 건 때가 중종 대다. 실록에는 "(단종이 사망했을 때) 고을 아전 엄흥도란 사람이 찾아가 곡하고 관을 갖추어 장사했다"라고 기록, 엄흥도가 영월 동강에 버려진 단종 시신을 수습하는 영화 엔딩 장면을 뒷받침한다. 엄흥도는 이후 조선 말기 고종실록에까지 꾸준히 이름을 올리면서 충절의 상징으로 기려진다.

야사집 '노릉지'도 호장 엄흥도가 단종 시신을 청령포 강물에서 건져 영월군 북쪽 동을지에 매장했다고 적었고, 연려실기술 역시 엄흥도가 모친상에 쓰려고 준비했던 관으로 단종의 장사를 치렀다든지 여러 기록을 인용했다. 노릉지는 영월군수 윤순거가 단종 관련 자료를 수집해 1660년 편찬했고, 연려실기술은 조선 후기 실학자 이긍익이 숙종 대까지의 조선조 주요 사건을 정부기록물, 야사, 문집을 망라해 정리했다.

엄흥도는 영화에서처럼 생전 단종과도 교류했을까. 기록이 없진 않다. 고종이 1876년 엄흥도에게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내릴 때 영의정 김병학은 시장(시호를 청하는 글)을 올리며 두 사람이 생전 인연이 있었노라 적는다. 단종이 꿈에서 사육신을 만나고 잠에서 깨어 통곡을 하자, 그 소리를 들은 엄흥도가 아내의 만류를 뿌리치고 강 건너 청령포로 찾아가 "곡소리를 듣고 마음이 슬퍼 왔습니다"라며 위로했다는 것. 다만 단종 사후 복권 과정에서 엄흥도의 명예를 드높이는 선양사업이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됐다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겠다.

②단종은 어떻게 죽음을 맞았나

세조실록은 1457년 10월 21일 기사에 "노산군(단종)이 스스로 목매어서 졸(卒)하니 예로써 장사 지냈다"고 적었다. 단종이 금성대군과 장인 송현수의 처형 결정 소식을 듣고 자결했다는 것. 송현수는 금성대군보다 한 달 앞서 그해 6월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역모를 꾀했다는 게 죄목이었는데, 이는 단종의 노산군 강등과 영월 유배로 이어진 바 있다.

오늘날은 영화 내용처럼 세조가 단종에게 사약을 내렸다는 게 정설이다. 실록에도 후대 임금이 직접 이를 밝히는 대목이 있다. "단종대왕께서 관복을 갖추고 마루로 나아오시어 온 이유를 하문하셨으나 (금부도사) 왕방연이 대답하지 못하였었다. 그가 봉명신(왕의 명을 받든 신하)으로서도 오히려 그러했는데…(후략)"(숙종 25년 1월 2일) 조선 중종 때 문신 이자는 개인 일기인 '음애일기'에 세조실록의 단종 자결 기록을 두고 "당시의 여우나 쥐 같은 놈들의 간악하고 아첨하는 붓장난"이라고 격하게 비난하기도 했다.

단종이 사약을 먹는 대신 활줄에 목이 졸려 죽음을 맞았다는 기록들도 영화와 궤를 같이한다. 연려실기술은 인조 때 나만갑이 지은 '병자록'을 인용해 단종의 최후를 이렇게 전한다. "통인(관아 심부름꾼) 하나가 항상 노산을 모시고 있었는데, 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단종이)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겼다." 노릉지는 단종이 그렇게 승하한 때가 10월 24일 유시(오후 5~7시)라고 명시하기도 했다. 실록도 마찬가지. 숙종은 저 발언에서 내처 "(단종을) 늘 모시던 공생(통인) 하나가 차마 하지 못할 일을 스스로 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고 했다.

통인이 어떤 마음으로 나섰는지 알기는 힘들다. 야사나 민담에선 상을 바랐다, 단종의 지시를 따랐다, 설이 분분하다. 단종이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였는지도 해석의 영역이다. 숙종실록과 연려실기술은 모두 통인이 그 자리에서 "아홉 구멍으로 피를 쏟고 죽었다"고 적었다. 어쨌든 천도를 거스르는 짓을 했다고 본 것이고, 영화는 이와 반대되는 해석을 따른 셈이다. 결국 극중 엄흥도는 단종 시신을 거둔 실존인물 엄흥도와, 생전 단종을 모셨고 사형까지 집행했다는 통인을 영화적 상상력으로 결합한 인물이라 하겠다.

③단종은 복위에 적극적이었나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관객이 1,000만 명을 넘어선 6일 서울 시내 극장에 이 영화 광고물이 게시돼 있다. 뉴시스

극중 단종은 유배지에서 자신을 복위시키려다가 몰살당한 사육신을 만나 "왜 우리를 버리셨나이까" 원망을 듣는 꿈을 꾼다. 이에 각성된 단종은 자신과 멀지 않은 경북 순흥에 유배된 숙부 금성대군과 전갈을 주고받으며 한양으로 진격할 군사 작전을 도모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맞선 단종복위운동 가운데 가장 손꼽히는 이 두 사건에 단종은 어느 정도 관여했을까.

성삼문 박팽년을 위시한 사육신 주도 복위운동의 경우, 세조실록은 당시 상왕이던 단종이 알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동자인 성삼문과 권자신(단종의 외숙부)이 국문 과정에서, 단종이 여러 차례 거사 계획을 보고받았고 거사 당일 찾아온 권자신에게 칼을 내려줬다고 진술했다는 것. 역시 세조실록 기록이지만, 단종 또한 1457년 6월 영월 유배지로 떠나면서 세조의 명을 받고 전송하러 온 환관에게 "성삼문의 역모를 나도 알고 있었으나 아뢰지 못하였다. 이것이 나의 죄다"라고 했다.

다만 단종이 금성대군과도 거사를 도모했다는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세조실록에 따르면 단종이 유배를 간 지 5일 뒤 세조는 금성대군 주도로 역모가 모의되고 있다는 고발을 직접 받았다. 그해 9월부터 세조는 대신과 종친에게 금성대군뿐 아니라 단종에게도 사약을 내리라는 요청을 줄기차게 받는데, 그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신숙주의 주청은 이렇다. "지난해 이개(사육신 일원) 등이 노산군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거사하려 하였는데, 이제 이유(금성대군 이름) 또한 노산군을 끼고 난역을 일으키려 하였으니, 노산군도 역시 편히 살게 할 수 없습니다." 단종이 반역에 가담했다기보단 계속 후환이 될 테니 없애야 한다는 주장에 가깝다.

④한명회가 일부러 단종을 자극했다?

영화는 세조 측이 의도를 갖고 단종 유배지로 영월을 선택했다는 가정을 깔고 전개된다. 세조의 동생으로 왕실 종친 가운데 세조와 가장 각을 세우던 금성대군의 유배지와 가까운 곳에 단종을 보내면 두 사람이 반란을 획책할 거라 계산했다는 설정이다.

사학계에서도 이런 류의 '역모 유도설'이 있다. 역사학자 박찬수는 2010년 논문에서 "단종과 금성대군이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의 일치인 듯 보이지만 세조 측의 치밀한 계획적인 함정으로, 한곳에 모아놓고 구실을 만들어 일망타진하려고 한 술책"이라고 주장했다. 크게 세 가지 정황근거를 제시한다. ①사육신 역모를 구실삼아 금성대군의 유배지를 옮길 때, 집현전 출신으로 단종에게 우호적인 이보흠이 부사로 있는 순흥을 선택한 점 ②그로부터 1년 뒤 단종을 순흥에서 멀지 않은 영월로 유배 보낸 점 ③금성대군이 역모를 꾀한다는 고발이 들어오자마자 일사천리로 관련자를 조사하고 처벌한 점.

영화는 이런 계책을 세우고 실행한 당사자로 세조 최측근 한명회를 지목한다. 계유정난 1등 공신이었던 한명회는 1456년엔 세조 비서실장 격인 승정원 도승지였고, 이듬해엔 대신으로 승진해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겸했다. 그런 실세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금성대군의 거병을 무산시켰다는 설정은 관객 몰입도를 높이려는 창작으로 보는 게 온당하겠다. 다만 단종 제거 과정에서 한명회가 '핵심 기획자' 역할을 했을 개연성은 있다. 세조실록에는 그가 반(反)세조 종친들을 단호히 숙청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세조가 금성대군 역모 고발이 들어오자 곧바로 한명회에게 사건 조사를 지시했다고 기술됐다.

금성대군의 거병 계획이 영화에서만큼 무르익었을지는 의문이다. 유배지 단종과 금성대군이 정말로 세조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면 더더욱 그렇다. 영월에서 단종을 모셔오는 대로 한양을 향해 진격할 채비를 했다는 극중 설정도 사료와는 차이가 있다. 연려실기술에 인용된 기록에는, 순흥에서 단종을 옹립하고 서울과 통하는 두 고갯길(조령 죽령)을 막아 영남을 호령하는 독립정부를 세우는 게 금성대군의 우선된 복안이었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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