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상]
벤 몽고메리 '게이트우드 할머니의 발자국'
엠마 게이트우드가 어깨에 자루를 짊어지고 있는 모습. 위키피디아
여기 미국의 3대 트레킹 코스 중 하나인 애팔래치아 트레일 완주를 꿈꾸는 사람이 있다. 소지품이라곤 집에 남는 천으로 만든 자루 하나뿐. 자루에는 텐트는커녕 침낭도 없고 비상약도 반창고·소독약·연고가 고작이다. 비바람 몰아치는 3,500㎞ 대장정을 앞두고 비옷 대신 욕실 방수커튼을 구비하고, 등산화가 아닌 운동화를 꺼내 신은 모습은 그저 무모해 보인다.
오늘날이라면 '희대의 도전'을 콘셉트로 하는 유튜브 채널이나 전문 산악인 단체에서나 시도할 법한 이 계획은, 70여 년 전인 1955년 5월 3일 68세 여성 엠마 게이트우드가 실행한 것이다. 키 162㎝의 크지 않은 체구에 치아는 몽땅 의치였으며 안경이 없으면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세상 떠날 날만 기다리던 늙은이'가 말이다.
잘 닦인 등산로라 해도 놀라울 지경인데 애팔래치아 산맥은 해발 1,600m가 넘는 300여 개 봉우리로 이뤄졌고 쉼터도 열악해 1949년부터 1955년까지 완주자가 겨우 5명, 그것도 모두 젊은 남성이었다. 1950년 11월엔 눈보라로 300명 이상 사망했을 만큼 기후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여기에 뱀, 곰 등 야생동물이 도사리고 있다.
애팔래치아 트레일 경로. appalachiantrail 사이트 캡처
자녀 11명을 길러내고 이제는 손자 손녀에게 둘러싸여 평온한 노후를 보낼 법한 노인이 사서 고생한다는 소식은 첫걸음을 뗀 지 48일째가 돼서야 한 기자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엠마는 가족에게 "잠시 산책 좀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사라진 터였다. 기억해야 할 점은 스마트폰은커녕 휴대폰이 나오기 20년 전 일이란 사실이다.
야생초로 샐러드를 만들고 이끼를 매트리스 삼아 잠드는 할머니의 이야기는 삽시간에 미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운동화가 닳아버린 엠마가 새 신을 사려고 잠시 인가에 나타나면 지역 언론사에 제보전화가 빗발쳤다. 기진맥진한 채로 주민들이 차려준 저녁을 먹었다거나, 허리케인으로 불어난 강물을 청년들과 함께 건넜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13개 주를 지나 마지막 구간이자 가장 험준한 지형에 도달했을 때 그는 안경이 깨져 장애물을 제대로 분간하기도 어려운 상태였다. 자칫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질 위험을 각오하고 조심스레 나아가길 수차례, 1955년 9월 25일 엠마는 트레일 종점에 올라선다. 일곱 번째 운동화를 신고, 146일 전 여행을 시작했을 때보다 몸무게가 14㎏ 빠진 채였다.
한 남성이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오르고 있다. intothebackcountryguides 사이트 캡처
자동차 산업이 유사 이래 최대 호황을 누리면서 고속도로가 깔리고 비전 대중화로 실내 오락이 보편화해 '걷는 행위'가 점차 불필요해지던 1950년대 미국에서 노구를 이끌고 3,500㎞를 주파한 엠마는 일약 사회의 모범이 됐다. 세계대전과 6·25전쟁을 치르며 잔뜩 경색된 정치권도 한목소리로 '국가적 영웅'이란 찬사를 보냈다. 트레일 재정비도 속속 이뤄졌다.
엠마는 도대체 왜 위험천만한 도전에 나섰을까. 첫 성공 이후에도 두 차례 더 애팔래치아 산맥을 정복하고 서부개척로를 따라 또 다른 3,500㎞를 걸으면서도 그는 '낭만적 사연'을 대지 않았다. 그러나 엠마의 가정사를 들춰보면, 그가 어떤 기자에게 "내가 살아온 인생에 비하면 이 정도 트레일은 별거 아니더군요"라고 말한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해볼 수 있다.
험난한 인생 중심엔 18세에 만난 남편 페리 게이트우드가 있다. 가난 탓에 고향을 떠나 홀로 정착한 새 마을에서 "결혼해주지 않으면 멀리 떠나가버리겠다"는 위협에 못 이겨 결혼식을 올린 지 3개월 만에 엠마는 폭력에 노출됐다. 시답잖은 이유로 출산 직전 아내를 두들겨 팰 정도로 잔인했던 그는 기어이 사람을 죽여 집안을 막대한 빚더미에 앉게 했다. 농장 경영도 형편없었다.
게이트우드 할머니의 발자국·벤 몽고메리 지음·수오서재 발행·400쪽·1만9,800원
몇 번의 가출 끝에 결혼 35년 만에 이혼 도장을 찍은 엠마는 남은 인생에서 전남편을 지우려 안간힘을 썼다. 처음 만난 이에겐 자신이 과부라고 말했고, 임종을 앞둔 페리가 "보고 싶다"고 부탁했을 때도 찾아가지 않았다. 물론 혼자 힘으로 가파른 골짜기를 넘으면서도 남성 등반객과 쉼터를 공유하는 날엔 '가정주부'로 회귀해 요리를 도맡는 모습은 시대의 한계를 절감하게 한다.
고요를 찾아 떠났다가 화제의 중심에 섰다는 점에서 엠마의 말년은 역설적이다. 미국 저널리스트 벤 몽고메리는 여성 최초로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완주한 엠마의 모험담과 함께 그가 횡단한 지역에 깃든 원주민 독립전쟁, 서부개척, 인종 갈등 등 미국의 역사를 조명한다. 저자는 엠마의 발자취를 쫓아 산길을 오르내리며 그의 호탕한 면모를 책에 되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