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이치 사카모토: 다이어리' 등 사카모토 다큐 3부작 개봉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다이어리'에서 사카모토 류이치는 2019년 봄 피아노가 어떻게 자연으로 돌아가는지 관찰해 보겠다며 뉴욕 자택의 정원에 피아노를 갖다 놓는다. 사진 속 피아노는 2년여가 지난 뒤의 모습. 영화사 진진 제공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3년 전 세상을 떠난 일본 출신의 세계적인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가 평소 좋아했던 폴 볼스의 소설 ‘셸터링 스카이’의 한 대목이다. 2020년 스무 시간의 대수술이 끝난 뒤에도 그는 이 문장을 중얼거렸다고 한다. 고인이 마지막으로 남긴 글인 문예지 ‘신초’ 연재 에세이와 이를 묶어 펴낸 책의 제목으로도 쓰인 이 문장은 소설을 영화로 옮긴 ‘마지막 사랑’에서도 들을 수 있다. 사카모토는 이 영화의 음악을 맡았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지 못하기에 인생을 마르지 않는 샘이라 여긴다”는 문장과 함께 시작하는 볼스의 글은 다큐멘터리 ‘류이치 사카모토: 다이어리’(내달 1일 개봉)의 서두를 장식한다. 사카모토의 마지막 3년여를 담으며 삶의 유한성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영화는 2023년 3월 28일 마지막 숨을 거두기까지 죽음과 함께 살아가는 고인의 모습과 투병 중에도 쉼 없이 이어갔던 음악 활동을 차분하게 전한다. 사카모토가 남긴 일기와 인터뷰 기록, 가족이 보유하고 있던 사적인 영상을 중심으로 제작됐다.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다이어리' 중 한 장면. 평소 한국을 좋아했던 고인은 말년에도 한글을 공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사 진진 제공
배우 겸 무용가 다나카 민이 읽어 내려가는 고인의 일기는 2020년 12월 4기 암 선고를 받은 직후에 시작한다. 안락사를 택할지, 항암 치료의 온갖 부작용을 참으며 몇 년의 삶을 더 기대할지 자문하던 그는 “무엇을 보든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슬프다”면서 “내 인생은 끝났다”라고 절망한다. 그러면서도 과거를 후회하기보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생각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다이어리' 중 한 장면.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 동료들인 호소노 하루오미(왼쪽부터), 다카하시 유키히로와 만난 사카모토 류이치. 다카하시는 사카모토보다 두 달 전인 2023년 1월 세상을 떠났다. 영화사 진진 제공
말년의 사카모토는 비와 바람 등 자연의 소리를 채집하고 “소리 없는 음악”이라는 구름과 달을 음악으로 표현하려 애썼다. 체력이 떨어지면 음악을 들을 힘이 없어 빗소리를 몇 시간씩 들었다거나, 페트병 뚜껑을 못 열 정도로 근력이 약해졌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 속에서도 사카모토는 마지막까지 죽음을 응시하며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나간다. 평생 반전 운동과 반핵 운동에 앞장 섰던 그는 투병 중에도 2011년 동일본 대지진 후 결성해 10년 이상 이끌었던 도호쿠 유스 오케스트라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보여 준다.
가족이나 주변인의 인터뷰는 많지 않다. 외숙부와 도쿄에서의 주치의, 그룹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YMO)의 동료 호소노 하루오미, 고인과 인터뷰로 자주 만났던 스즈키 마사후미 등이 짧게 이야기하는 정도가 전부다. 영화감독 네오 소라, 가수 사카모토 미우 등 두 번의 결혼과 한 번의 사실혼, 입양으로 얻은 2남2녀는 이름도 없이 목소리만으로 한 번씩 등장해 담담하게 아버지를 회고한다.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다이어리'. 영화사 진진 제공
사망 직전까지 음악에 대한 열정을 드러내는 고인의 모습은 감동적이다. 사카모토는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채 침대에 누워 도호쿠 유스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며 지휘를 하다 끝내 눈물을 보인다. 타계 1시간 전에는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피아노를 연주하듯 깡마른 손가락을 움직인다. 차녀 사카모토 미우는 “(아버지가) 멋진 인생이었다고 말씀하셨던 게 기억 난다”면서 “멋진 인생이었으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도쿄 멜로디'. 영화사 진진 제공
‘류이치 사카모토: 다이어리’에 이어 2편의 다큐멘터리가 잇따라 개봉한다. 내달 15일 국내에 처음 선보이는 ‘류이치 사카모토: 도쿄 멜로디’는 솔로 아티스트로, 그룹 YMO의 일원으로 그리고 영화음악가로 세계 음악계에 알려지기 시작하던 1984년 당시의 사카모토를 다시 볼 수 있는 작품. 1980년대 이후 일반에 거의 공개되지 않았으나 엘리자베스 레나드 감독의 지하실에서 오리지널 16㎜ 필름이 발견되며 4K 리마스터링을 거쳤다. 1984년 네 번째 솔로 앨범 ‘음악도감’ 제작 과정과 30대 사카모토의 패기 넘치는 모습을 비춘다. 두 번째 아내이자 유명 음악가인 야노 아키코와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아 연주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내달 29일 7년 만에 재개봉하는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를 비롯한 세 편의 다큐멘터리는 사카모토의 젊은 시절부터 죽기 전까지 음악 세계를 한 번에 훑어볼 수 있게 해 준다. 세 작품에서 공통으로 들을 수 있는 곡은 고인의 대표작이기도 한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 주제곡이다. 32세 사카모토의 솔로 연주와 동일본 대지진 당시 피난소로 쓰였던 이와테현의 한 중학교에서 열린 2012년 자선공연, 2020년 ‘플레잉 더 피아노 12122020’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카모토 류이치라는 예술가의 초상이 어떻게 변해갔는지 들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