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린스키 수석무용수 김기민 '볼레로' 출연
23~26일 GS아트센터 베자르 발레 로잔 내한 협업
"기술력 최고지만 획일성 경계해야" 한국 발레 향한 조언도
김기민은 "공연을 완벽하게 이끌어내기 위해 볼레로 음악을 들으며 일어나고 볼레로 음악과 함께 잠자리에 든다"고 말했다. ⓒYOON6PHOTO
"'볼레로'는 제 꿈만이 아니라 (스승인) 블라디미르 킴 선생님의 꿈이기도 합니다. 러시아 관객들이 제게서 가장 보고 싶어하는 춤이기도 하고요. 마린스키 관객은 약간 배신감이 들겠죠. 초연을 한국에서 하니까요."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 수석무용수 김기민(34)의 얼굴에 설렘이 가득했다. 한국 기자들의 업무 시간에 맞춰 이른 아침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자택에서 모니터 앞에 앉은 김기민은 피곤한 기색 없이 전설적 안무가 모리스 베자르(1927~2007)의 걸작 '볼레로'를 소개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한국 무용수로는 처음으로 이 작품의 주역 '선율'(La Mélodie·라 멜로디)을 맡은 김기민이 2일 한국 언론과 화상으로 만났다. ‘볼레로’는 무대 중앙의 붉은 원형 테이블 위에 선 주역 무용수 '선율'과 이를 에워싼 남성 군무 '리듬'이 결합해 모리스 라벨의 점층적 음악을 시각화하는 작품이다. 김기민은 23~26일 GS아트센터 베자르 발레 로잔(BBL) 내한 공연에 함께한다.
마린스키 발레 수석무용수 김기민은 베자르 발레 로잔 '볼레로' 내한공연에서 붉은 원형 테이블 위에 올라 '선율'을 연기할 예정이다. ©BBL - Marc Ducrest
김기민에게 이번 공연은 "이번 생에는 추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접어 뒀던 꿈"이 현실이 된 무대다. 그는 발레리노 조르주 돈(1947~1992)의 공연 영상을 보고 '볼레로'와 사랑에 빠졌지만, 세계 발레 인맥이 적지 않은데도 좀처럼 기회가 닿지 않았다. 김기민은 "정말 하고 싶은 춤은 쉽게 잡을 수 없다고 생각하던 3~4년 전쯤 이번 공연을 기획한 인아츠프로덕션의 출연 제안을 받았다"고 출연 배경을 설명했다.
그가 맡은 선율은 구체적 서사 없이 음악 자체를 의인화한 역할이다. 김기민은 이 추상적인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해 줄리앙 파브로 BBL 예술감독과 치열하게 소통했다. 그는 "감독님과 개그 코드가 맞을 정도로 '케미'가 좋았다"며 "'이 테이블 위에서는 모든 사람이 너처럼 죽고 싶어 한다'는 디렉션이 인상적이었다"고 연습 과정을 돌아봤다. 그러면서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쁘게 받아들이며 춤을 출 수 있는 작품이어서 정말 많은 감정을 느끼고 또 그렇게 연습하고 있다"며 "연습할 때마다 우주에서 온 음표가 내 손을 움직이는 느낌이 든다"고 덧붙였다.
모리스 베자르. ©Jean-Guy_Python_Lausanne
김기민은 이 작품 주역을 맡은 '최초의 한국 무용수'라는 타이틀보다 베자르의 예술적 유산이 온전히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을 반복적으로 피력했다. 그는 "베자르는 20세기 이후 무용수들에게 큰 유산을 남겨준 안무가"라며 "최초라는 수식어보다 중요한 것은 이번 공연을 계기로 BBL이 한국 관객과 지속적으로 만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베자르의 현대 발레와 클래식 발레와의 충돌에 대해서는 "베자르가 듀스카 시프니오스(1933~2016)에게 (1961년) 초연을 맡긴 것도 클래식 무용수의 몸을 좋아해서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클래식에서 변형된 동작이 많아 몸에 잘 맞는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발레리노 김기민. 프레인 제공
올해로 마린스키 입단 15주년을 맞으며 한국 발레의 높은 위상을 몸소 증명해 온 김기민은 후배들을 향한 애정 어린 조언도 잊지 않았다. "한국 무용수들의 아카데믹한 기본기와 기술적 정확성은 세계적 수준"이라고 국내 무용 교육에 자부심을 표하면서도 "입시용 눈속임에 능숙해 수분간의 기술로 콩쿠르에서 입상하지만 정작 발레단에서 전막 공연을 소화하지 못하는 '백지 상태'인 경우도 있다"고 우려했다. "획일화된 기술과 음악성, 감정에 변화를 주지 않으면 큰 문제가 될 수 있다"고도 했다.
김기민은 23·25일 '볼레로'에 출연한다. 24·26일은 여성 무용수가 선율을 맡는다. BBL은 베자르의 또 다른 안무작인 '불새', 아시아 초연작인 '햄릿'과 '바이 바이 베이비 블랙버드'도 함께 한국 무대에 올린다. 김기민은 "이보다 더 열심히 준비할 수 없을 정도로 200%의 노력을 쏟았다"며 "예술을 말로 다 설명할 순 없지만 '볼레로'는 보고 나면 내면의 뜨거운 움직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작품으로 '강추'한다"며 웃어 보였다.
김기민이 스위스 로잔에서 줄리앙 파브로 베자르 발레 로잔 예술감독과 '볼레로' 연습을 하고 있다. 인아츠프로덕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