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 발자취 따라 가는 강원 영월 여행
어린 임금 유배지 ‘육지 속 섬’ 청령포
관음송 육백년에 서린 왕의 긴 그리움
소쩍새 울음에 피맺힌 자규시의 한밤
역사에 이름없이 스러진 268충신 위패
외로운 봉분 하나에 깃든 오백년 울림
앞은 강으로, 뒤는 산으로 막힌 육지 속 섬 강원 영월 청령포.
세종의 손자이자 문종의 아들로 태어나 16세에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왕 단종.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밀려난 소년은 강원 영월의 강물과 산자락에 기대 마지막 시간을 견뎌야 했다. 그의 유배 생활과 죽음을 그린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관객의 마음을 울리며 작품 배경이 된 영월에도 발길이 이어진다. 스크린 속 장면과 역사가 포개지는 그 길 위에서 어린 왕의 발자취를 바람만바람만 뒤따랐다.
◆섬 같은 육지에 갇힌 어린 왕=
1452년 아버지 문종이 38세 나이로 승하하자 단종은 10세 때 왕위에 오른다. 세종의 차남 숙부 수양대군이 왕위를 넘보며 압박하자, 1455년 단종은 결국 왕위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1456년 성삼문을 비롯한 대신이 단종을 복위시키려 하지만 이 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이 사건으로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된 후 1457년 음력 6월22일 영월 청령포로 유배를 떠난다. 청령포는 남쪽은 산으로 막혀 있고 동·북·서쪽은 서강으로 둘러싸여 ‘육지 속 섬’이라 부른다.
청령포에 들어가려면 배를 타야 한다. 강폭이 넓지 않아 탑승 시간은 1분 남짓. 그 옛날 뗏목으로 건너기 어렵지 않았을 테고, 헤엄을 칠 줄 안다면 맨몸으로도 뭍에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숙부의 손아귀에 넘어간 조선 팔도에 그가 숨거나 도망갈 곳이 있었으랴. 불귀(不歸)의 강 앞에서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을 마주한 열여섯 소년의 심정은 어떠했을지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영조가 친필로 새긴 ‘단묘재본부시유지비’.
배에서 내린 뒤 자갈 깔린 길을 오르면 단종의 거처를 복원한 단종어소가 모습을 드러낸다. 오래전 사라졌으나 영월군이 ‘승정원일기’ 기록에 따라 2000년 기와집으로 복원했다. 집 옆엔 영조가 친필로 새긴 ‘단묘재본부시유지비’가 이곳이 단종이 기거했던 곳임을 알려준다. 홍성숙 관광해설사는 “생육신 조려가 남긴 ‘어계집’엔 단종이 머물던 곳이 겨우 기와만 얹은 초라한 집이었고 밤이면 산짐승이 주변을 어슬렁거렸다고 기록돼 있다”고 말했다.
단종이 고향을 그리며 쌓았다고 전해지는 망향탑.
청령포는 자연 경관도 빼어나다.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에는 수령 600년으로 추정되는 소나무 ‘관음송’이 30m 높이를 자랑한다. 밑동이 두 갈래로 나뉘어 뻗어 있는데 단종이 그 사이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산길을 오르면 단종이 서 있었다는 ‘노산대’와 고향을 그리워하며 돌을 쌓았다는 ‘망향탑’이 등장한다. 그곳에서 흘렸을 눈물은 500여년이라는 세월의 다리를 건너 오늘 청령포를 찾은 사람들 마음에도 잔잔히 번진다.
단종이 마지막을 맞이한 관풍헌.
◆피 맺힌 자규시가 남은 자리=
청령포에 있던 단종은 홍수를 피해 영월의 관아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긴다. 관풍헌은 청령포에서 3㎞ 떨어진 영월 읍내에 자리한다. 관풍헌 맞은편엔 누각 ‘자규루’가 있다. 1428년(세종 10)에 세운 것으로 원래 이름은 ‘매죽루’다. 단종은 누각에 올라 피를 토하며 구슬피 우는 소쩍새(자규)에 자신을 빗댄 ‘자규시’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누각에 자규루라는 이름이 붙게 됐다.
단종은 1457년 음력 10월24일 관풍헌에서 죽음을 맞는다. 단종의 여섯째 숙부 금성대군은 단종을 복위시키려 하지만 실패하고 사약을 받는다. 세조실록엔 단종의 죽음을 놓고 “노산군이 금성대군의 죽음을 듣자 슬픔을 못 이겨 스스로 목을 맸으며, 예를 갖춰 장사지냈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세조 이후 기록은 단종의 타살을 이야기한다. 숙종실록엔 ‘의금부사 왕방연이 단종에게 죽음을 내려야 하는데 망설이자 단종의 시중을 들던 공생(과거 준비생)이 나서 단종을 죽였다’고 적혔다.
역사서 ‘장릉지’는 ‘공생이 활 끈으로 노산군의 목을 졸라 숨지게 하였다. 노산군의 옥체는 청령포 강물에 던져 버린 것을 영월 호장 엄흥도가 몰래 거두어 영월군 북쪽 5리쯤의 동을지에 매장했다’고 전한다. 또 다른 야사에는 엄흥도가 단종을 묻을 곳을 찾고 있을 때 눈이 많이 내려 맨땅을 찾기 어려웠단다. 그때 산에 앉아 있던 노루 한마리가 인기척에 놀라 달아났는데 노루가 머물던 자리에는 눈이 녹아 맨땅이 드러나 있었다. 엄흥도는 하늘이 내린 좋은 징조로 여겨 그곳에 단종을 매장했다고 한다.
◆200년 만에 얻은 이름, 장릉=
단종 사후 숨겨져 있던 무덤은 1516년(중종 11) 왕명으로 그 위치가 세상에 알려진다. 1698년 숙종이 단종을 복위하고 장릉이라는 능호를 내렸다.
장릉 입구에 들어서면 단종의 생애를 조명한 ‘단종역사관’을 시작으로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 1726년(영조 2년)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고자 세운 ‘엄흥도정려각’이 차례로 이어진다. 조금 더 걸으면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268인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이 있다. 충신 32인의 이름이 적힌 위패엔 두번째로 금성대군이, 맨 마지막에 엄흥도가 올라 있다.
장판옥 옆 언덕에 난 경사로를 따라 오르면 모습을 드러내는 장릉.
장판옥 옆 언덕에 난 경사로를 따라 오르면 능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경사로는 조선 왕릉 가운데서도 가장 가파르다고 한다. 애초에 왕릉으로 조성된 곳이 아니어서다. 숨을 고르며 힘겹게 마주한 능은 소박하다. 어린 왕의 가여운 삶을 닮은 듯이.
열여섯해의 짧은 생을 살았지만 50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다양한 문학작품과 대중문화 안에서 살아 숨 쉬는 단종. 단출한 봉분 아래 잠들어 있는 그가 만약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감상하며 울고 웃는 관객을 봤다면 어떤 생각을 품었을까.
장판옥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위패에 새겨진 인물의 이름을 하나하나 되뇌어본다. 장구한 역사의 흐름 가운데 권력을 향한 인간의 탐욕과 집착이 얼마나 허망한가를 사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