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KM 갤러리에서 정현 작가(사진)는 조각과 회화 등 다채로운 신작을 통해 자연의 역동적인 생명력과 치유의 힘을 드러냈다. 이나경기자
국내 최장수 아트페어인 화랑미술제가 봄과 함께 막을 올렸다. 8일 VIP 프리뷰를 시작으로 12일까지 코엑스에서 개최되는 ‘2026 화랑미술제’는 올해 169개 갤러리가 참여한 역대 최대 규모로, 전시장 안은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과 상담을 이어가는 갤러리 관계자들로 빠르게 채워졌다. 특히 한국화랑협회 50주년을 맞이하며 그간의 발자취를 아카이브와 함께 선보이며 의미를 더했다.
부스 사이를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멈추는 지점이 생긴다. 근현대 미술을 선도한 오랜 전통의 샘터화랑은 올해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와 윤형근 등의 작품을 출품했다. 단색화 거장들의 회화 작품 사이에서 이명숙 작가의 조형 작업은 부스의 분위기를 다채롭게 만들었다. 닭과 돼지, 사람의 표정이 어딘가 익살스럽게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70세에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해 80대에 화랑미술제까지 진출한 그는 “민화를 좋아해 친숙한 소재에서 출발했다”고 말하며, 최근에는 넷플릭스 콘텐츠 ‘케이팝 데몬 헌터스’ 속 캐릭터를 작업에 반영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샘터화랑에선 이명숙 작가(사진)의 ‘케이팝 데몬 헌터스’ 등을 소재로 한 다채로운 작품이 부스의 색채를 더했다. 이나경기자
샘터화랑에선 이명숙 작가(사진)의 ‘케이팝 데몬 헌터스’ 등을 소재로 한 다채로운 작품이 부스의 색채를 더했다. 이나경기자
조선화랑 부스는 또 다른 결을 보여준다. 작품에 앞서 느껴지는 건 시간의 무게다. 샘터화랑과 함께 2019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된 조선화랑은 1971년 문을 열었다. 권상능 조선화랑 대표(93)는 “화랑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조차 낯설던 시절부터 미술시장을 만들어왔다”고 지난 시간을 회고했다. 권 대표는 한국화랑협회 창립회원으로서 제3·9·11대 회장을 역임하며 기존 멤버들과 함께 협회와 화랑미술제를 이끌어온 인물이다. 김춘옥 작가 등 한국미술계 굵직한 소속 작가들과 30여년 세월 함께하며 돈독한 모습 보였다.
올해 전시의 또 다른 묘미는 솔로부스의 확대다. 지난해 신설돼 큰 관심을 모은 단일 작가 집중 조명 섹션 ‘솔로부스’는 올해 C홀 메인 동선에 배치됐다. 한 작가의 작업을 밀도 있게 들여다보려는 관람객들의 체류 시간이 눈에 띄게 길었다. ‘내면의 공간(Inner Space)’을 주제로 한 필갤러리의 김정한 작가 작품 앞에서는 텍스트와 패턴이 겹겹이 쌓인 화면을 가까이 들여다보는 이들이 이어졌고, “숲 같다” “군중 같다”는 각자만의 해석이 오갔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화랑 중 하나인 조선화랑을 이끄는 권상능 대표(오른쪽 첫줄 첫번째)와 그와 오랜 세월을 함께한 소속 작가들은 화랑협회 50주년을 맞이한 화랑미술제의 의미를 더했다. 이나경기자
PKM갤러리에서는 정현 작가의 조각이 주목받았다. 한국 조각계를 대표하는 정현 작가의 조각 앞에서는 그의 팬을 자처하는 관람객들로 붐볐다. 거칠게 잘려나간 듯한 표면과 단순한 형태는 처음에는 투박해 보이지만, 오래 바라볼수록 묘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작가는 “거세 당하고 잘려나간 이후에도 폭발적으로 다시 자라나는 자연의 힘, 그 ‘재생’의 에너지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관람객들로 붐빈 또 다른 부스, 가나아트는 문형태 작가의 작품을 통해 관계의 감정 구조를 풀어냈다. 점토를 채워 넣고 선을 긋는 방식으로 완성된 화면은 도자기 유약을 입힌 듯한 질감을 띠며, ‘Perfect Picture’ 시리즈에서는 기쁨과 슬픔이 반복되는 관계의 순환을 보여준다. 단순한 형상 속에 감정의 층위를 담아내며 프리뷰 단계에서부터 잇단 판매가 이뤄졌다. 그런가하면 갤러리전의 이상용 작가는 벼루를 소재로 한 조각과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기하학적 이미지로 풀어낸 시리즈를 선보이며 장르의 경계를 확장했다.
굵직한 중진 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신진 작가 특별전 ‘ZOOM-IN’에서는 전도유망하고 깊이감 있는 신진 작가들의 수준 높은 작업도 살펴볼 수 있었다. 이들은 색다른 작업세계와 독특한 관점을 제시했다. 김수연 작가는 기하학적 언어를 활용해 시간의 개념을 시각화하며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 잡았다. 그는 서울을 기준으로 해와 달이 뜨고 지는 시간을 바탕으로 1년의 흐름을 시각화한 ‘달력’ 시리즈, ‘천지창조’라는 주제 아래 시간과 음악의 구조를 연결해 24시간을 5도권으로 나누고 이를 시각화하는 작업 등을 선보였다.
정현 작가의 작품은 무심하면서도 폭발적인 재생의 에너지를 지닌 자연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나경기자
김수연 작가의 작품 ‘달력’ 시리즈와 ‘시간의 화음_3년간의 8월’ 등 신진부스에서는 독창적인 작품을 선보이는 작가들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이나경기자
이성훈 한국화랑협회장은 “이번 화랑미술제를 통해 한국 미술계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하나로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한편 서울 코엑스에 이어 한국화랑협회는 오는 6월25일부터 28일까지 경기도 수원에서 ‘2025 화랑미술제 in 수원’을 개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