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투초대석] 권오남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제22대 회장
최연소·최초 현직 장점, 학계가 원하는 것 빠르게 파악
R&D 예산 확대 의미있지만, 신뢰·안정성 회복엔 한계
연구현장의 목소리, 정책 형성과정에 반영되도록 최선
권오남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 인터뷰 /사진=김창현 기자 chmt@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358년 만에 증명됐듯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인내자본'(Patient Capital)입니다. 단기성과 압박에서 벗어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할 수 있는 R&D(연구·개발)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권오남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이하 과총) 제22대 회장은 "연구비가 끊겨 실험실 문을 닫아야 했던 과학계 동료의 이야기를 우리는 기억한다"며 "나무를 심고 열매를 거두려면 계절을 기다려야 하듯 연구에도 씨앗을 뿌리고 기다리는 시간, 즉 인내자본이 필요하다"고 했다.
권 회장은 이어 "대한민국이 기술을 뒤쫓는 나라에서 기술의 '기준'을 세우는 나라로 나아가려면 무엇보다 연구현장의 생생한 목소리가 정책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고 했다. 앞으로 3년간 과총을 이끌 권 회장을 지난 20일 서울 강남구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과총은 전국의 604개 과학기술분야 학회 및 단체, 500만명에 이르는 과학기술인이 함께하는 한국 대표 과학기술 단체다.
권오남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 인터뷰 /사진=김창현 기자 chmt@
-수많은 '최초' 타이틀을 보유했습니다. 난관이 있었다면.
▶지난해 세계수학교육심리학회(IGPME) 회장에 당선됐습니다. 아시아 여성으로서 최초입니다. 유서 깊은 수학교육계 학회로 영국·유럽 출신 학자가 전통적으로 강세였는데 이번 경쟁 상대는 캐나다 남성 교수였습니다. 그분은 본인의 당선을 확신했는데 개표결과 압도적인 차로 제가 당선됐습니다. 몇몇 유럽계 학자는 학회에서 한국인이 투표에 많이 참여한 결과라며 억지항의까지 했다고 합니다. 물론 한국인의 투표참여는 많지 않았습니다.
과총 역사상 최연소 회장이기도 합니다. 그간 회장은 현직에서 은퇴한 학자들이 맡았습니다. 저는 여전히 학교 강단에 서는 최초 현직 회장이기도 합니다. 이는 지금의 학계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게 필요한지 빠르게 파악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과총 사상 두 번째 여성 회장이기도 합니다.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2000년 초반만 해도 교수진 중 여성 비율이 매우 낮았습니다. 갓 부임한 제게 "여성할당제로 뽑혔느냐"고 묻는 이도 있었습니다. 같은 경험을 공유한 학자 중에서는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능력으로 교수가 된 것이니 굳이 직함 앞에 '여성'을 붙일 이유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그럼에도 저는 '여성 회장'이라는 타이틀이 싫지 않습니다. 여성이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관점이 만나 더 풍부한 과학적 성과를 만들어 내듯 의사결정 구조도 마찬가지입니다. 2023년 맥킨지가 23개국 1265개 기업을 분석한 결과 경영진의 성별 다양성이 상위 25%에 드는 기업은 하위 25% 기업 대비 재무성과가 39% 높았습니다. 2015년 첫 조사 당시 15% 정도 격차에서 8년 만에 39%까지 벌어진 겁니다. 다양성은 단순한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성과의 핵심동력이라는 뜻입니다.
과학기술 조직도 예외가 아닙니다. 조직의 의사결정은 다양한 경험과 시각이 만날 때 더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합니다.
-과총 임원진은 어떻게 구성했습니까.
▶그간 과총은 젊은 과학자에게 '가까이하기엔 먼 당신'이었습니다. 과총의 주요 결정은 이사회가 하는데 이사회는 각 학회 회장을 중심으로 구성됩니다. 그런데 회장은 해당 학계에 20~30년 몸담은 분입니다. 아무리 빨라도 60대 중반입니다. 실제 연구현장에서 무엇이 필요한지 과총이 알기 어렵고 목소리를 대변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이 점을 개선하기 위해 전체 임원진 88명 중 40·50대 임원 비중을 40%대로 끌어올렸습니다. 여성 비율은 25%로 높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숫자 늘리기가 아닙니다. 조직이 변하기 위해 필요한 임계질량을 30%라고 합니다. 다양성이 최소 30% 확보돼야 뭔가 변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과총은 지난해 회장의 권력남용 등 비위논란에 휩싸였습니다. 논란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과학기술계는 높은 전문성과 공공성을 바탕으로 사회의 신뢰 위에 서 있는 공동체입니다.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면 더욱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제도와 절차가 촘촘하지 못했거나 조직 내 책임성이 느슨해질 때 비슷한 논란이 언제든 반복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신뢰는 말이 아니라 구조로 증명해야 한다'는 원칙을 분명히 세우고자 합니다. 재정과 의사결정 과정의 투명성을 높이고 규정과 절차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도록 점검하겠습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책임을 분명히 하고 내부통제와 점검체계도 강화할 계획입니다.
-올해 R&D(연구·개발)예산은 '역대 최대'입니다. 기대하는 점이 있다면.
▶R&D예산이 확대된 건 매우 의미있는 일입니다. 다만 예산증액만으론 한 번 흔들린 연구생태계의 신뢰와 안정성을 되찾기 어렵습니다. 과학기술계에 필요한 건 '인내자본'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벤처투자에서 말하는 인내자본은 당장의 을 요구하지 않고 장기적 성장을 기다리는 투자를 말합니다.
기초과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핵심은 3가지입니다. 먼저 연구자가 단기성과 압박에서 벗어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할 수 있도록 인내자본을 투자해야 합니다. 3년 단위의 과제평가는 5년, 7년으로 늘리고 중간평가의 기준도 '얼마나 성과를 냈는가'에서 '얼마나 의미있는 질문을 던지는가'로 바꿔야 합니다.
연구행정도 효율화해야 합니다. 연구자들이 행정업무가 아닌 연구 그 자체에 몰입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과총 학술진흥위원회가 현장의 이런 고충을 잘 알고 있습니다. 위원회를 통해 현장의 목소리를 체계적으로 수렴한 후 구체적인 개선안을 만들 계획입니다.
무엇보다 R&D예산은 정치적 논리가 아닌 과학적 근거에 기반해 배분돼야 합니다. 씨앗을 뿌리는 시기에는 날씨가 아니라 토양을 봐야 합니다. R&D예산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적 바람이 아니라 과학적 토양, 즉 현장 연구자의 판단에 기반해 배분돼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과학기술계의 가장 근본적인 과제입니다. 과총이 근거에 기반한 정책제안을 통해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3년 임기 동안 꼭 해내겠다는 목표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현장의 과학기술인이 정책의 실질적인 주인이 되는 구조를 안착시키는 것입니다. 단순한 의견전달 창구가 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연구현장의 목소리가 정책형성 과정에 실제로 반영되는 이른바 '공명(共鳴) 플랫폼'으로서 역할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매주 15㎞를 뛰는 마라토너입니다. 마라톤 풀코스를 뛰다 보면 30㎞쯤 됐을 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며 어떤 '벽'이 느껴집니다. 이를 극복하고 움직이게 하는 건 옆에서 함께 달리는 동료의 규칙적인 발소리입니다. 지금 우리 과학기술계는 R&D예산 변동과 인력이탈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 서 있습니다. 500만 과학기술인의 발걸음을 하나로 모아 이 벽을 넘어서는 것이 과총 회장으로서 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