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일범 경제부장
반도체와 달리 中에 밀린 배터리
기술패착, 자금난에 이중고 신음
주가 부양 매몰, 투자 동력 잃을라
환원보다 재투자가 주주가치 제고
잘나가는 반도체에 가려져 있지만 우리 경제의 가장 아픈 손가락은 배터리 산업이다. 최대 경쟁자인 중국은 시장점유율 70%를 넘겨 사실상 독점 체제로 진입했다. 가성비는 물론이고 본원 기술력조차 중국보다 별로 나을 게 없다는 것이 산업계의 뼈 아픈 고백이다. 저렴하고 안정적인 리튬·인산·철(LFP) 배터리 대신 성능이 뛰어난 삼원계에 집중 투자했던 결정이 결과적으로 패착이 됐다.
반도체처럼 미국이 중국을 견제해 한국에 우산을 씌워주는 운도 없었다. 미국의 대(對)중국 첨단산업 견제가 없었다면, 한국이 미국의 실리콘 동맹에 끼지 못했다면, 우리 경제는 어쩌면 중환자실에 누워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아직 배터리 경쟁을 포기할 단계는 아니다. 에너지저장장치(ESS)와 같은 분야에서 한국의 경쟁력이 살아 있고 꿈의 배터리라고 불리는 전고체 배터리, 소듐(나트륨)이온 배터리와 같은 차세대 기술 경쟁이 아직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짧은 주행거리, 겨울철 성능 저하 등 LFP의 단점까지 감안하면 향후 휴머노이드나 도심항공교통(UAM) 등 첨단제품에서는 삼원계 배터리가 다시 왕좌를 차지할 가능성도 남아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런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2~3년 운영자금만 확보해주면 살아날 수 있다 수준의 국제통화기금(IMF) 시절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우리 기업들은 내로라하는 해외 기업들과 피 튀기는 경쟁을 하고 있다. 시설 및 연구개발(R&D)에 매년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어야 간신히 살아남아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문제는 국내 배터리 기업들의 투자 여력이 이미 한계치에 도달했다는 점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올 1분기 2000억 원이 넘는 영업손실을 냈고 SK온도 지난해 1조 원에 가까운 적자를 기록했다. 시장에서는 특히 사실상 상장이 어려워진 SK온의 미래를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 재계와 국내 인수합병(M&A) 업계에서 마당발로 잘 알려진 한 인사는 SK온의 생존 해법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SK온이 살아남는 방법은 단 하나, SK하이닉스가 인수하는 것뿐입니다.” 공정거래법상 지주사 규제, SK하이닉스 주주들의 극렬한 반발 등을 생각하면 불가능에 가까운 시나리오다. 하지만 이런 극약 처방까지 거론될 만큼 벼랑에 몰려 있는 게 우리 배터리 기업의 현주소다.
최근 재계에서는 본말이 전도된 자본시장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애초 기업공개(IPO)는 기업들이 막대한 자금을 조달하고 위험을 분산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다. 최초의 상장사라고 할 수 있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나 미국 철도망 건설 과정에서 생겨난 월스트리트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 자본시장은 시장 친화적 관리를 명분으로 주가 부양만을 의식하는 방향으로 치우치고 있는 게 아닌지 염려된다. 중복상장이 사실상 금지됐고 유상증자도 너무 까다롭다. 물론 강남 아파트로 대변되는 지대(地代) 추구의 경제에서 기업과 소상공인·가계가 활력을 가지고 뛸 수 있는 생산적 경제로 전환하자는 데 이견이 있을 리 없다. 변호사 시절부터 주식 투자를 시작해 시장에 밝은 이재명 대통령이 기업 거버넌스 개선, 자사주 소각 의무화, 중복상장 금지 등의 정책을 밀어붙이면서 ‘박스피’ 소리를 듣던 한국 증시가 전 세계 최고 상승률을 기록하는 역사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주가가 지속적으로 우상향하는 최선의 방법은 기업 자체가 끊임없이 성장하는 것이다. 확대나 자사주 소각도 기업이 커질 때에나 강구해볼 수 있는 조치다. 알파벳·아마존·메타·마이크로소프트 등 4대 빅테크 기업의 올해 투자 규모는 6500억 달러(약 966조 원)로 우리나라 올해 예산보다 많다. 인공지능(AI)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년 대비 투자 규모를 2배나 늘렸다. 자사주 매입과 소각까지 줄여가며 만든 돈이다. 테슬라는 상장 이후 단 한 번도 을 하지 않았다. 이들을 반(反)주주 기업으로 부른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