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ESG] 칼럼
금융위원회가 2026년 2월 ESG 공시 로드맵 초안을 발표하면서 한국의 지속가능성 공시 체계가 윤곽을 드러냈다. 2028년부터 연결자산 30조 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를 시작으로 의무 공시가 도입되고, 스코프(Scope) 3 배출량은 2031년부터 단계적으로 적용된다. 발표 시점이 정부에서 이야기한 것과 달리 계속 미뤄진 탓에 도입 시점이 조금은 늦었지만, 분명히 의미 있는 첫걸음이다.
연결기준 자산총액 30조 원이라는 기준은 조건부로 수용할 만하다고 본다. MSCI 코리아 지수 내 기업 중 해당 기준을 충족하는 기업들의 업종 다양성이 다소 부족하나, 배출권거래제 대상 배출량의 절반 이상이 포착되고 철강·정유·발전 등 2035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달성에 핵심적인 고배출 산업이 포함된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이 시가총액 기준을 택한 반면, 한국은 연결기준 자산총액을 택했다는 점이다. 이는 현재 거래소 공시에서 법정 공시로 전환될 경우, 코스피 상장사뿐 아니라 코스닥 상장사와 비상장사까지 적용 대상을 넓힐 수 있는 구조적 여지를 남기는 것이라고 필자는 믿는다. 오히려 아쉬운 것은 스코프3 배출량 공시의 3년 유예다.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를 비롯한 주요국의 유예기간은 통상 1년 수준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시를 기업에만 요구하면서, 정작 그 정보를 활용할 주체들은 준비가 되어 있는가? 따져 보면 아쉬운 부분이 눈에 띈다. 먼저 기관투자자를 보자. 공시가 정보의 생산이라면, 스튜어드십은 그 생산된 정보의 활용일 것이다.
아시아 기후변화 투자자 그룹(AIGCC)이 아시아 주요 기관투자자 230개 사의 2024년 기후 행동을 분석한 결과, 75%가 기후변화를 재무적 리스크로 인식하고, 35%가 기후 전환 계획을 공시하고 있다. 그중 AIGCC 회원사 62개 사는 77%가 기후 인게이지먼트 활동에, 61%가 정책 옹호 공동 서한에 참여하는 등 공시 정보를 실질적인 투자 판단과 스튜어드십 활동에 연결하고 있다. 한국은 어떠한가. 한국의 스튜어드십 코드는 2016년 제정 이후 단 한 차례도 개정되지 않았고, 기후 요소조차 명시되어 있지 않다.
기관투자자가 기후 정보를 활용하려 해도, 이를 체계적으로 고민하고 시장에 설명할 제도적 유인이 부족한 상황이다. 기업에게 공시를 요구하면서 그 정보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지 보여주지 못한다면, 제도의 설득력은 떨어지고 왜 이것을 하는지 의구심만 키울 뿐이다. 기관투자자가 기후 리스크를 투자의사결정에 어떻게 반영하는지, 스튜어드십 활동을 어떻게 수행하는지를 시장에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야 기업들도 공시 정보의 쓰임을 체감하고, 더 나은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정부도 당연히 이 정보를 활용하는 주체에 해당한다. 다행히 움직임은 시작되고 있다. 한국회계기준원 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KSSB) 로드맵이 발표되는 동시에, 2035년까지 790조 원 규모의 기후금융 공급 계획과 한국형 전환금융 가이드라인이 발표되었다. 한국형 녹색전환(K-GX) 전략 발표를 앞두고 있으, 탄소중립기본법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른 개선입법 논의가 진행 중이고, 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도 수립 중이다. 이 모든 정책이 실효성을 갖추는 과정에서 기업의 공시 데이터가 기반이 될 것이다.
배출량, 전환 계획 및 목표 등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 위에서 전환금융의 방향이 설계되고, NDC 경로가 구체화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정책에 대한 논의 과정과 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한다면 신뢰도를 더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공시는 기업만의 숙제가 아니라 시장 전체의 인프라다. 기업이 정보를 생산하고, 투자자가 이를 활용하며 자금을 공급하고, 정부가 이를 토대로 전환 경로를 설계하는 하나의 생태계다. 이 선순환이 갖춰져야 비로소 공시 제도가 완성되었다 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출발을 했으니 이제는 빨리 움직일 차례다.
조대현 아시아 기후변화 투자자 그룹(AIGCC) 한국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