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횃불·촛불·응원봉, 동학농민혁명 6] 세계 종교창도자와 종교개혁가들은 체포·소환될 때 어떤 상황이었을까
▲ 최제우 초상
용담정 안에서 보는 수운
ⓒ 정만진
최제우는 포덕 4년 째인 1864년 12월 10일 조정의 선전관 정운구의 지휘 아래 중앙관졸과 경주부졸 30여 명에 의해 체포되었다. 41세 때이다. 조정에서 그에게 씌운 죄목은 유학 즉 공자의 학(學)을 문란시킨 사문난적과, 서학이라는 사술로 어리석은 백성들을 기망하였다는 것이다.
사문난적은 동학이 성리학을 국교로 삼아온 조선의 '국책위반'이라 치더라도, 서학은 얼토당토 않는 죄목이었다. 서학에 맞서고자 창도한 동학을 서학으로 치죄하는 것은 억지였다. 가톨릭 신부의 견해이다.
동학은 이를 창도한 최제우 자신의 주장에 의하면, 1860년 (철종11년)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동학은 곧 정부로부터 사학시(邪學視)되어 창시자인 최제우는 결국 1863년 관헌에 붙잡히어 이듬해 3월 대구에서 사형에 이르렀다.
제우는 이때 서학을 모방하였다고 하여 서학의 혐의를 받고 사형되었다. 애당초 서학에 대항하기 위해 동학을 창도하게 되었다는 동기를 고려할 때 비록 정부의 처사이기는 할지라도 도리어 그가 배척하여 마지않던 서학으로 몰리어 처형되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최석우, '서학에서 본 동학', <교회사연구(제1집)>, 113쪽, 한국교회사연구소, 1977)
한참 잠을 자다 변을 당한 최제우와 제자들은 포졸들이 휘두른 방망이에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저항하지 않았다.
"정구룡이 장졸을 이끌고 이르러 갑자기 들이닥쳐 어명이라 하여 선생을 체포했다. 어명이라 하니 어쩌겠는가? 순순히 명을 받아 체포되니 그 때의 광경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윤석산 역주, <초기동학의 역사 : 도원기서>. 95쪽) 이때에 박씨부인과 맏아들 세정(世貞)도 포박되어 경주부로 끌려갔다.
세계 종교창도자와 종교개혁가들은 체포·소환될 때 어떤 상황이었을까. 네 사람의 경우를 살펴본다.
예수
예수가 체포되었을 때 대부분의 그의 제자들은 붙잡힐까봐 도망을 쳤다. 그러나 그의 원수들이 그의 피를 요구하는 마당에서 그는 - 소크라테스와 같이 - 자신을 방어하지 않았다. 베드로는 칼을 뽑아서 그를 구출하려고 했다. 그는 무쇠와 강철의 무기를 가지고 어린아이의 바보스런 투쟁심만 성숙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칼로 얻은 승리는 또다른 싸움의 시작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놀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칼을 집어치워라.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할 것이다."
로마의 군인들에게 발설한 예수의 이 말은 예언적이 아닐 수 없다. 정복과 승전의 행진을 계속하던 로마제국은 실제로 죽음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빌라도는 그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명령했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 로마의 관습에 따라서 나무로 만든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헨리 리 토마스 외 지음, 황철호 역, <위대한 종교가들>, 93쪽.)
존 후스
존 후스에게 드디어 재앙이 떨어졌다. 콘스탄스라는 스위스 한 도시에서 열리는 교회평의회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그에 대한 죄목은 당시 교회의 권한으로서는 가장 무서운 이단이었다. 그의 친구들은 창백해졌다.
"그는 확실히 콘스탄스까지 먼 길을 여행해서 그 자신을 적 진영에 내던지지는 않을 것이다."
보헤미아의 집은 마지막 피를 흘릴 때까지 그를 보호하기로 결심한 용감한 기사들의 보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
여기 그대로 계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할 수 있다면 당신을 끌고 가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후스는 "나는 콘스탄스에 가서 내 교리를 변호하겠다"라고 선언했다. (앞의 책, 159쪽)
마르틴 루터
교황은 루터에게 이단의 심판을 받기 위하여 보름스(Worms)로 소환했다.
"여기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교황의 약속에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루터는 마차를 타고 피리를 불면서 그곳으로 떠났다. 여행중에는 언제나 위장의 고통을 참기 위하여 계속 피리를 불고 있었다. 그는 이미 주기적인 위암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음악은 선지자의 예술이다."(앞의 책, 176쪽)
마하트마 간디
영국 정부는 그의 메달을 받아들이고 그에게 다른 선물 - 감옥소로 보내는 선물 - 을 주었다. 당시 간디와 같이 체포된 힌두인의 숫자는 5천 명이었다. 그들은 감옥으로 향하면서 즐겁게 노래를 불렀다.
재판정에서 간디는 유죄를 인정했다. 그는 정부를 배반하고 고의적으로 법을 어겼다고 고백했다. 그의 재판을 진행하고 있던 부름스필드 재판관에게 "나는 관대한 처분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정상을 참작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겠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고의적인 범죄와 시민의 가장 고귀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판결에 해당하는 최고형을 요청하며 또한 그 최고형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그러므로 당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당신이 사직을 하든지 혹은 나에게 가장 엄한 형벌을 주는 것이다." ( 앞의 책, 317쪽)
덧붙이는 글 |
[횃불·촛불·응원봉, 동학농민혁명]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