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론자 다카이치가 108조 투자로 파병 청구서를 막은 미일 회담의 내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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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일본의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와 만찬을 주최하며 발언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 EPA=연합뉴스
개헌을 강하게 주장해 온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이번 호르무즈 사안에서는 오히려 헌법과 국내법의 제약을 전면에 내세웠다. 3월 19일 백악관 회담 뒤 다카이치는 "일본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트럼프에게 설명했다"고 밝혔다. 이번 '외교우선'이 순수한 외교적 결단이라기보다 법적 제약 속에서 나온 현실적 대응이었다는 점이 이 한 문장에 담겨 있다.
다카이치는 회담 전부터 자위대의 호르무즈 파견에 대해 "현재는 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문제의 핵심은 헌법 9조와 2015년 안보법제의 구조에 있다.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려면 정부가 해당 사태를 '존립 위기 사태'로 공식 인정해야만 발동이 가능하다. 이번 호르무즈 정세에 대해 그런 판단은 내려지지 않았고,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도 3월 16일 국회에서 "함정 파견 계획은 없다"고 재확인했다. 결국 '외교우선'은 다카이치의 정치적 미덕이라기보다, 현행 제도가 먼저 설정한 행동 한계의 산물이었다.
3월 19일 백악관 회담에서 트럼프는 일본의 호르무즈 기여 확대를 다시 촉구했다. 회담 중 그는 진주만을 언급하는 농담성 발언을 했고, 이 장면은 일본 안팎에서 외교적 결례 논란을 낳았다. 뉴욕타임스와 알자지라 등 복수의 외신이 다카이치가 이 순간 당혹스러운 표정을 보였다고 전했다.
1991년의 기억이 일본외교를 주저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회담 결과를 보면 일본은 군사 파견을 약속하지 않았다. 다카이치는 이란의 핵 개발을 비난하고 조기 긴장 완화를 촉구하는 선에서 답했고, 대신 약 730억 달러(약 108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 2차 패키지를 제시했다. 여기에는 소형 모듈 원자로(SMR) 건설 협력과 미국 내 천연가스 발전소 투자가 포함됐다. 미일 양국은 회담 이후 호르무즈 안전을 위해 "긴밀히 소통한다"는 원론적 합의만 내놓았다. 파병이 아닌 자본으로 동맹 청구서를 지불한 셈이었다.
일본의 해외 자위대 활동은 1991년 걸프전 직후 소해함 파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맞았다. 당시 일본은 격렬한 국내 논쟁 끝에 소해함 6척을 파견했지만, 그것은 미군 전투 임무가 종료된 뒤였고 명확한 법적 근거도 없었다. 일본국제문제연구소의 사도 아키히로는 이 결정이 "해상자위대를 위한 법적 근거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이 경험의 충격이 1992년 국제평화협력법(PKO법) 제정으로 이어졌고, PKO 5원칙은 자위대 해외 파견을 정전 합의 이후 비전투 지역으로 엄격히 제한했다. 35년이 지난 지금 일본이 호르무즈 앞에서 다시 주저하는 이유도, 정치적 소극성이 아니라 그때 형성된 법적 틀과 직접 이어져 있다. 현행 자위대법은 전쟁이 진행 중인 호르무즈 해협에서 미국 주도 작전에 자위대가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어떤 조항에서도 제공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본이 취할 수 있는 현실적 선택지는 전투 종료 후 '기뢰 제거(소해)' 활동에 참여하거나, 과거 아덴만 해적 대처와 같이 별도의 특별법 근거를 활용한 '우회 파견' 방식에 국한된다.
외교가 먼저라는 경고
마이니치신문은 3월 17일 사설에서, 이번 호르무즈 사태의 혼란을 워싱턴 스스로가 촉발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다른 나라에 군함 파견을 요청하는 것은 정당성이 없다고 못 박았다. 중동산 원유의 90% 이상을 의존하는 일본의 최우선 과제는 군사적 동참이 아니라 전투 종식과 해협의 안정 회복이며, 일본이 1973년 오일쇼크 이후 반세기 넘게 구축해 온 대이란 우호 관계를 감안할 때 성급한 군사 가담은 미일 동맹 관리를 넘어 중장기 에너지 외교 전반에 심각한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사설의 핵심 판단이다.
주목할 점은 트럼프가 3월 18일 소셜미디어에서 "일본 등의 해군 지원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밝혔다가, 불과 하루 뒤인 19일 정상회담에서 다시 기여를 촉구하는 발언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전후 모순은 이번 파병 압박이 일관된 안보 전략의 산물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유동하는 정치적 메시지에 불과했음을 트럼프 스스로 드러낸 것으로, 일본 측의 신중한 대응에 일정한 명분을 제공한다.
2월 8일 총선에서 자민당 단독 316석, 연립 352석이라는 전후 최대 의석을 확보한 다카이치 내각은 측근을 중의원 헌법심사회장에 기용하며 개헌 논의 가속화 의지를 분명히 했다. 그러나 개헌안 발의를 위해서는 중의원뿐 아니라 참의원에서도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하고, 이후 국민투표까지 통과해야 하는 만큼, 압도적 의석이 곧 개헌 실현을 보장하지는 않으며 그 경로는 여전히 험난하다.
9조를 가장 싫어하는 총리가 9조를 방패삼아 살아남았다
이번 호르무즈 사안이 개헌 논의에 미치는 함의는 단순하지 않다. 단기적으로는 개헌 추진에 오히려 부담이 될 가능성이 크다. 개헌 찬성론의 핵심 동력은 "9조 때문에 위기 시 행동할 수 없다"는 무능감이지만, 국민이 이번에 실제로 목격한 것은 그 무능감이 아니라 9조가 전쟁 개입 압박을 막아내는 방패로 작동한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파병을 강행했다가 이란과의 외교 마찰, 유가 급등, 국민 반발이 동시에 터졌다면, 그것이야말로 개헌 여론에 더 큰 역풍이 됐을 것이다.
반면 보수 진영은 정반대의 논리를 펼 수 있다. 에너지 안보가 직결된 위기 앞에서도 즉각 행동할 수 없었다는 사실 자체가, 9조 개정의 필요성을 뒷받침하는 구체적 사례로 축적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 사건은 개헌 논의를 단번에 촉진하는 결정적 계기라기보다, 찬반 양측이 각자의 논거로 재해석할 수 있는 복합적 선례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이번 사태가 보여준 핵심은 동맹이 명령과 복종의 관계가 아니라 협상의 공간이라는 점이다. 일본은 미국의 파병 요구를 즉각 수용하지 않았으며, 그 배경에는 헌법적 제약, 국내법, 에너지 의존 구조, 대이란 외교관계가 복합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영국·독일·프랑스 역시 파병을 거부했고, 트럼프 자신도 하루 사이에 입장을 번복함으로써 이번 압박이 일관된 동맹 전략이 아니었음을 스스로 드러냈다.
다카이치가 군사 기여 대신 경제 투자 카드로 이번 외교적 고비를 넘긴 것은, 제약된 조건 속에서 동맹을 관리하는 현실주의 외교의 전형을 보여준 사례다. 호르무즈 위기의 본질은 누가 더 충성스러운 동맹인가가 아니라, 법과 외교의 제약 속에서 각국이 어디까지 움직일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었다. 1991년 걸프전 이후 35년간 반복되어 온 그 물음의 이름은 여전히 평화헌법 9조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미디어파인에도 실립니다.글쓴이 김영근은 현재 고려대학교 글로벌일본연구원 겸 인문학과동아시아문화산업과정 교수이다. 도쿄대학교에서 국제관계학 박사를 취득한 후,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 및 계명대 일본학과 조교수를 역임하였다. "AI시대의 안전경제학: 글로벌 불확실성 및 위기관리" 및 "북핵 리스크 관리와 ‘국제안보레짐’의 변용: 한미일 ‘연계정치’ 및 정책조정 메커니즘을 중심으로"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