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의 갑작스러운 방문... 앞으로도 할머니 집이 '작은 쉼터'가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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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김도 수려하고 내면까지 고운 큰 손자에게 전화가 왔다.
"할머니, 지금 집에 계세요? 저, 가도 돼요?"
"응, 나 집이야. 어서 와. 우리 손자가 온다면, 언제든 땡큐지!"
"할머니, 아이스크림 사 가려는 데 무슨 맛 좋아하세요?"
"아무거나 다 좋아. 우리 손자가 사 오는 건, 뭐든 다 맛있어!
며칠 전 이사 오던 날, 우리집에서 놀던 큰 손자랑 단둘이 걸어서 딸 집에 간 적이 있다. 그때 걸어서 오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그 길이 기억에 남고 도시의 얼굴이 분명하게 그려졌나 보다.
반성문을 쓴 손자
전날 큰 딸네의 집들이를 했고 술을 몇 잔 마신 탓에 차를 놓고 왔다. 다음 날 차를 가지러 가며 아침도 간단히 먹기로 했는데… 남편은 자고 있어서 결국 나 혼자 갔다. 밥을 먹는데 큰 손자는 자기 방 책상에서 무언가를 쓰고 있었고 큰딸은 아는 체하지 말라고 눈짓했다.
가족들과 식탁에서 빵과 블루베리를 먹고, 커피를 마시는 데 자꾸만 큰 손자에게 눈길이 갔다.
방으로 들어가 보니, 아이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반성문을 쓰고 있는 게 아닌가.
상황을 파악하고 한참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는데 그때까지도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계속 안절부절못하니 큰딸이 또 눈짓했다. 편지지 맨 마지막 줄에 '성호 올림'이라고 쓰여 있었다.
눈물을 훔치는 아이에게 조용히 말했다. "성호야, 반성문 쓰는데 양도 중요하지만, 마음이 더 중요해. 꼭 한 장을 안 채워도 돼. 네 마음을 진심으로 담으면 되는 거야."
아이는 편지를 엄마에게 건네고 식탁에 앉았지만, 목이 메어 계속 훌쩍거렸다. 엄마에게 호되게 혼난 후 눈물에 밥 말아 먹었던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밥을 먹고 바삐 집으로 돌아오는데 딸은 주차장까지 따라오면서 자초지종을 말했다.
요즘 손주들이 핸드폰이나 태블릿 PC를 너무 자주 보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 벼르고 벼르던 중이었단다. 그날 아침 큰 손자가 화장실에서 태블릿 PC를 보고 그냥 두고 나온 일이 화근이었다. 물에 젖으면 망가질 수 있는 물건인데, 평소 물건을 소중히 다루지 않는다는 이유로 엄마 아빠한테 된통 혼났단다. 그래서 반성문을 쓰게 시켰고 물건의 소중함을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교육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혼이 난 아이는 마음이 너무 힘들고, 달리기 하며 달래보려 했지만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단다. 그러니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겠지. 그러다 문득 저 멀리 할머니 집이 보였고, 결국 전화를 하게 된 것이다. 이야기하는 손자의 눈가가 촉촉해졌고 내 가슴도 먹먹해졌다. 집에 돌아가기 싫은 순간, 할머니 집을 떠올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참 고마웠다.
나는 늘 생각해 왔다. 언젠가 손주들이 사춘기를 맞으면, 그때 할머니 집에 와서 공부도 하고 쉬기도 하고, 마음도 안정시켰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귀한 손님' 13살 손자의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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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에 찾아온 손자에게 참 고맙다
ⓒ 챗gpt
그때 할머니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편안하게 들어주고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는 일 아닐까. 그런데 그 바람이 현실이 되었다. 스스로 판단해 길을 찾아 할머니 집에 온 열세 살 손자. 참으로 귀한 손님이 우리 집에 왔다.
어디 나쁜 길로 빠지지 않고 왔다는 것이 가장 감사한 일이었다. 그래도 '할머니가 손자에게 비빌 언덕이었구나' 계속 아이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 내렸다.
운동하고 있는 남편에게도 전화했다.
"여보, 우리 집에 귀한 손님이 왔어. 빨리 와."
"누군데?"
"성호가 혼자 왔어."
그 말을 듣자마자 서둘러 짐을 꾸리고 안심 스테이크를 사서 바람처럼 달려왔다. "성호야, 아빠 고기 잘 굽지? 그런데 할아버지도 고기 맛있게 잘 굽는다. 먹어봐." 집게로 육즙이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한입 가득 넣어주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쌈을 먹으면서 당귀 잎도 코끝에 대주며 향을 맡게 하고, 생소한 상추 나물도 권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생들 없이 자기 혼자 할아버지가 구워준 고기를 먹으면서 싱글 벙글 웃는 아이. 손자가 행복하면 할머니는 더 행복하다. 예약 없이 찾아온 귀한 손님이기에 우리 집에 있는 걸 총동원해서 대접했다.
밥을 먹고 난 후 손자는 엄마와 ○○○베이커리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우리는 보드라운 손자 손을 꼭 잡고 신이 난 아이처럼 힘차게 흔들어 댔다.
가는 길에 할아버지는 아이스크림 가게로 들어갔다. "동생들 엄마 아빠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네가 좋아하는 맛을 골라봐." 신나서 키오스크를 누르는 손길이 빨라졌다. 횡단보도 건너편에 서 있는 딸은 오랫동안 보지 못한 연인을 본 듯 손을 흔들었다. 아이는 큰 통을 품에 안고 신나게 뛰어가 엄마 품에 와락 안긴다. "그놈 참, 제 엄마 보니, 기운이 나나 보네!" 우리는 웃음 가득한 모자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할머니 집은 손주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채우는 곳일까. 아니면 마음 놓고 쉬어갈 수 있는 작은 쉼터일까.
무엇이든 좋다. 그저 이곳에서 잠시라도 위로 받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잠시 후 딸에게서 문자가 왔다.
"엄마 아빠 감사해요. 오늘 우리 성호가 할머니 할아버지 덕분에 알 하나를 깼어요."
오늘 혼자 힘으로 알을 깬 아이. 이번 일로 키와 마음 한 뼘은 더 큰 듯싶어 내 마음까지 고슬고슬해졌다. 나도 답장을 보냈다.
"성호가 혼자 찾아와서 감동했어. 우리는 아이를 에워싼 듯 가운데 앉히고 꽤 긴 시간 동안 식사를 했어. 엄마 아빠 그늘을 벗어나, 처음으로 할머니 집을 찾아온 귀한 손님을 맞이하니 하늘을 부웅 나는 기분이더라. 손자 덕에 도파민으로 샤워한 듯 신이 난 하루였어."
손주는 늘 귀한 손님, 뭐든 더 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그런데 딸도 사위도 손주들도 참 잘하고 있다.
바쁘게 생활하다 보니 어느새 주변에 있는 친구들과도 소원해졌다. 가끔은 누군가에게 기대 마음을 나누며 이야기하고 싶어도 선뜻 손을 내밀기 쉽지 않다.
아이들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힘들 때, 아무 말 없이 찾아갈 수 있는 곳.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고, 그냥 있어도 되는 곳. 그저 와서 밥 한 끼 먹고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곳.
그날, 성호는 그런 곳으로 할머니 집을 떠올렸다. 그날 우리 집에 찾아온 것은 손자가 아니라, 한 아이의 '용기' 였다. 나는 그 용기를 조용히 품어 안았을 뿐이다.
덧붙이는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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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할머니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편안하게 들어주고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는 일 아닐까. 그런데 그 바람이 현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