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서부 탐방기 ⑤] 거대한 바위산들이 꿈틀거리는 원시의 땅, 자이언 캐니언
낯선 세상을 향한 동경은 인간의 보편적 정서인지 모릅니다. 인공의 때가 덜 묻은 원시의 자연을 느끼고 싶어 2026년 3월 3일부터 10일까지 미국 중서부 지역의 협곡(canyon) 여러 곳을 다녀왔습니다. 현지에서 보고, 관찰한 것들을 토대로 몇 차례 나누어 소개하려고 합니다. <기자말>
브라이스를 출발해 1시간쯤 달렸을까. 직선으로 뻗은 길이 끝나는가 싶더니 편도 1차선의 좁은 산길이 시작됐다. 도로에 깔린 아스팔트가 붉은색으로 포장되어 있다. 공원 지역을 알리기 위함인가 보다. 앞서 가던 차들이 속도를 줄인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20분쯤 지나고 나니 자이언 캐니언(Zion Canyon) 국립공원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인다.
▲ 자이언 캐니언 국립공원 동쪽 입구 표지판
: 공원길이 붉은색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다
ⓒ 설지원
'자이언'은 요새라는 뜻의 히브리어다. 약속의 땅이라는 의미도 있다. '시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유타주에는 총 5개의 국립공원이 있는데, 입장객이 가장 많은 곳이 자이언 캐니언이다. 본래 이름은 '무큰투윕(Mukuntuweap)'이었는데, 모르몬교인들이 자이언으로 바꿨다고 한다. 무큰투윕은 원주민 말로 '곧은 화살'이라는 뜻이다. 하늘로 곧게 뻗은 바위들의 모습을 보고 지은 이름일 것이다.
그랜드 캐니언과 마찬가지로 이 지역도 한때 바다였던 지역이 솟아오르면서 고원을 이루었고, 수천만 년 동안 강물에 의한 침식이 일어나면서 오늘날과 같은 계곡이 만들어졌다. 그랜드 캐니언을 주조한 강이 콜로라도라면, 자이언 캐니언을 설계한 건 버진강(Virgin River)이다. 브라이스 캐니언과 인접해 있어서 두 지역을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이언에 들어서려면 1.8킬로미터의 어둡고 긴 굴(Carmel Tunner)을 지나야 한다. 1920년대 후반에 착공해 1930년에 개통했다고 한다. 굴을 지나면 협곡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이어진다. 자이언 캐니언을 넓게 조망할 수 있는 지점은 두 곳이 있다, 하나(엔젤스 렌딩)는 길이 험해 접근이 어렵고, 다른 하나(오버룩 트레일)는 비교적 쉬운 편이다.
동쪽 입구로 들어온 사람은 터널을 지나기 전 오른편에, 반대쪽 입구로 온 사람은 터널을 지난 직후 왼편에 탐방로와 주차장을 볼 수 있다. 이 탐방로(Canyon Overlook Trail)를 따라 올라가면 높은 지점에서 협곡을 관찰할 수 있다. 주차장이 비좁아서 주차가 어려울 수 있다는 이야기가 많았는데, 다행히 빈자리가 있어서 차를 세울 수 있었다.
좁은 탐방로를 따라 30분쯤 올랐을까. 협곡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가 보인다. 협곡 사이로 가느다란 길이 뱀처럼 휘어져 있고, 길 양편에 근육질의 바위들이 위용을 자랑하며 하늘로 뻗어 있다. 바위인지 산인지 구분이 안 된다. 브라이스를 여성에, 자이언을 남성에 비유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바위와 협곡이 어우러져 연출하는 모습이 장관이다.
▲ 오버룩 트레일에서 바라본 자이언 캐니언
: 높이 800미터, 길이 24km에 이르는 거대한 협곡이다
ⓒ 설지원
탐방객들이 협곡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다. 다람쥐들이 바위를 뛰어다니며 놀고 있다. 가까이 접근해도 놀라거나 도망가지 않는다. 인간을 경계하지 않다니 어찌 된 영문일까. 전망대 가까운 곳에 특이한 형상을 한 바위가 보인다. 대부분의 바위는 붉은색인데, 짙은 회색을 띠고 있다. 바둑판 모양처럼 생겼다고 해서 체커보드 메사(Checkerboard Mesa)라는 이름이 붙은 바위다. 표면에 줄을 그은 것 같은 격자 무늬가 특이하다.
▲ 오버룩 트레일 전망대의 다람쥐
: 얌전히 앉아 자세를 취해주었다
ⓒ 설지원
▲ 체커보드 메사
: 표면의 격자 무늬는 풍화와 침식이 만든 상처라고 한다
ⓒ 설지원
탐방로에서 내려와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니 풍경이 바뀐다. 백두대간의 험한 고갯길을 내려갈 때가 연상된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순환버스를 타기로 했다. 주말이라 그런지 주차장이 만원이다. 쾌청한 날씨에 봄을 즐기러 온 사람들로 공원은 활기가 넘친다. 그랜드와 브라이스는 주로 위에서 아래를 굽어보지만, 자이언은 아래에서 위를 바라본다는 점이 다르다.
공원에는 다양한 탐방 경로(trail)가 조성되어 있는데, 가장 인기가 높은 경로는 천사만 내려앉을 수 있다는 엔젤스 랜딩(Angels Landing)이다. 협곡 전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최상의 장소지만, 가파른 능선을 따라 위험한 절벽을 타야 한다. 방수 신발을 신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경로(The Narrows)도 있다. 협곡 양편에 잇대어 선 붉은 기암괴석들이 연출하는 경관이 신비감을 자아낸다고 한다.
▲ 자이언 캐니언 네로우즈 경관
: 유타주 관광청 누리집(visitutah.com)
ⓒ 유타주 관광청
미 중서부 최고의 탐방로 중 하나로 꼽히는 명소이니 이곳을 방문할 기회가 생긴다면, 미리 계획을 세워 비경(秘境)을 감상해보시기 바란다. 물이 얼음처럼 차다는 것, 바지와 신발이 흠뻑 젖게 된다는 것.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아쉬움이 컸지만, 우리 일행은 나이와 체력을 고려해 상대적으로 쉬운 경로(Emerald Pool/Riverside Walk)를 택했다.
탐방 전에 점심을 먹기 위해 공원 안에 있는 식당을 찾았다. 전기 시설이 고장 나서 조리를 할 수 없단다. 낭패다. 주전부리로 끼니를 때워야 할 판이다. 이럴 땐 당분이 많은 고열량 식품을 섭취하는 게 최선이다. 얼추 식사를 마쳤을 무렵, 수리가 끝나서 식당이 다시 영업을 개시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여기저기 볼멘소리가 나온다. 짜증이라기보다 유쾌한 탄식에 가깝다.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 자이언 롯지(lodge) 앞 잔디밭에서 진행된 결혼식 장면
: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 설지원
공원 한쪽, 키 큰 떡갈나무가 서 있는 잔디밭에서 결혼식 준비가 한창이다. 국립공원 안에서 결혼식이라니, 영화 속 한 장면 같다. 볕 좋은 곳에 자리를 깔고 일광욕을 즐기는 이들 사이로 공작새 한 마리가 유유히 걸어가고 있다. 네로우즈 탐방을 가는 것으로 보이는, 장화를 신은 젊은이들이 시끌벅적하다. 파란 하늘과 맑은 공기, 따사로운 햇살이 대지를 비추는, 평화로운 정경이다. 전쟁은 먼 나라 이야기다.
다양한 색깔의 바위를 볼 수 있다는 '에메랄드 풀' 경로를 따라 탐방로를 걷기 시작했다. 거대한 바윗덩어리들이 병풍처럼 협곡을 에워싸고 있다. 바위 높이가 600∼900미터에 달한다. 뉴욕의 세계무역센터(541미터), 서울의 롯데월드타워(555미터)보다 큰 키의 바위들이 즐비하다는 뜻이다. 바위 겉면이 예리하게 깎인 건 수백만 년 동안 강이 바위 밑동을 깎아내 벽이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 에메랄드 풀 탐방로에서 올려다본 바위
: 중간중간 바위가 검게 변한 건 철이 산화되면서 생긴 현상이다
ⓒ 설지원
▲ 에메랄드 풀 근처에서 발견한 검은 백조
: 바위 그림자가 맞은 편에 비친 형상이다
ⓒ 문진수
가족 단위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빼어난 볼거리를 기대하기보다 그저 자연이 허락해 준 공간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봄꽃이 만발할 무렵이나 단풍이 물들 때의 자니언은 어떤 모습일까. 산과 강이 한데 어우러져 그려내는 섬세한 풍광은 이곳보다 우리 강산이 더 빼어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고 하지 않던가.
탐방을 마치고 숙소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들렀던 협곡 중 어디가 제일 인상적이었는가?'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어떤 이는 그랜드의 장엄함이 맘에 든다고 했고, 어떤 이는 브라이스의 별빛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다시 방문하고 싶은 곳은 어디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선 한 목소리로 자이언을 꼽았다. 특별한 경험은 한 번이면 족하지만, 아름다운 장소는 다시 찾고 싶다는 뜻이리라.
▲ 식당 근처에서 촬영한 자이언 캐니언의 바위
: 석양빛에 붉은 바위가 더욱 붉게 물들었다.
ⓒ 설지원
미국의 해양 생물학자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은 환경의 중요성을 일깨운 기념비적인 글 <침묵의 봄(1962)>에서, 지구의 아름다움을 눈여겨보는 사람들은 생명이 이어지는 한 지속할 힘을 찾아낸다고 적고 있다. 자연과의 교감이 정신 회복력을 만들어준다는 뜻이다. 자연은 삶에 지친 이들에게 위로와 치유를 선물하는, 경이로운 존재다.
덧붙이는 글 |
7일, 생명의 땅 제주에 치유의 길을 닦은 서명숙님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