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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읽는 것과 삶으로 겪는 것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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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가 자주 멈추는 요즘, 한 문장 앞에서 서두르지 않는 까닭

하루에도 수십개의 글을 읽는다. 그러나 저녁때가 되면 무엇을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읽었지만 머물지 않았고, 넘겼지만 닿지 않았다. 책장을 넘기다 문득 멈추는 순간이 있다. 이해가 막혀서가 아니라 문장이 나를 붙잡을 때다. 그때 읽기는 멈춰지고, 비로소 생각이 자라난다.

언젠가 참여했던 독서모임에서였다. 누군가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에서 한 문장을 소리내어 읽었다.

"좋아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늦게까지 하라. 어떠한 향락이나 호기심도 포기하지 말고 불가능에 도전하라."

한 사람이 문장을 다 듣고 난 뒤, 잠시 말을 멈추었다. 짧은 침묵이었지만 방안의 공기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 분은 잦아든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문장이 저는 좀 불편했어요"

여든을 넘긴 분이었다. 그 분은 더듬더듬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날이 스러져가는 몸에 불을 지피라는 말이라는 것은 안다. 그러나 이미 많은 것을 내려놓은 자리에서, 아직 포기하지 말라는 말은 격려가 아니라 짐처럼 느껴졌다. 여기저기 고장나는 몸을 하루하루 챙기며, 그나마 일주일에 한 번 책을 읽고 이 자리에 나오는 것. 그것만으로도 지금은 벅찼다. 그 분은 거기에서 말을 멈추었다.

아무도 그녀의 말을 재촉하지 않았다. 나는 그 문장을 눈으로만 읽었지만, 그녀는 삶으로 겪고 있었다. 이해와 경험 사이에 그런 거리가 있다는 것을 그날 나는 처음으로 실감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 분의 말이 내내 마음에 얹혔다. 그분에게 그 문장이 불편했던 것은, 문장이 자신의 자리에 너무 멀리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너무 가까이 닿아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같은 문장 앞에서 멈추지 않았다. 다시 책을 펼쳐 브뤼크네르의 문장을 천천히 소리내어 읽었다. 나는 이 문장 앞에서 얼마나 깨어있었을까. 얼마나 느꼈을까.

가와시마 류타는 <독서의 뇌과학>에서, 책을 읽는 동안 뇌는 단순히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만들고, 감정을 시물레이션하며,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문장을 연결하는 복잡한 작업을 수행한다고 한다. 이 과정은 느리고 비효율적이며, 반드시 멈춤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바로 그 느림의 틈새에서, 비로소 생각의 뿌리를 내린다.

그러나 나는 요즘 자주 낯선 감각을 느낀다. 종이책을 읽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손가락이 먼저 움찔한다. 화면을 스크롤하듯 종이 위를 밀어 올리려 하는 것이다. 문장이 조금만 길어져도 눈이 앞서 달린다. 한 페이지를 다 읽었지만 무엇을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손은 이미 다음 장을 넘기고 있다. 읽고 있지만 머물지 않는다. 페이지는 넘어가는데 생각은 따라오지 못한다.

나의 몸은 이미 다른 속도에 길들여져 있었다. 그것은 게으름이라기보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화면들이 요구하는 읽기의 방식에 가깝다. 빠르게 훑고, 핵심만 추리고, 판단한 뒤 넘겨버리는 읽기. 그 읽기는 나름의 능력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될 때, 무언가가 소리없이 사라진다. 멈춤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있던 감성도 함께 휘발된다. 누군가의 삶이 한 문장 안에 깃들어 있다는 감각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 속도 안에서 자란 아이들은 어떨까. 얼마 전 접한 보고서에서 읽었다. 독서를 멀리하는 아이들 중 상당수가 꼽은 이유는 단순했다. 책보다 스마트폰과 영상이 더 재미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아이들의 잘못은 아니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세계가 그들을 먼저 길들였을 뿐이다. 다만 나는 가만히 자문해본다. 멈춤을 연습하지 못한 아이가, 언젠가 타인의 불편한 고백에 귀를 기울이며 함께 머무는 시간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 물음은 아이들에게만 향하지 않는다. 어쩌면 나 역시 매일 조금씩 그 연습을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머묾 속에서 생각도 과일처럼 익는다. 덜 여문 것은 쉽게 흘러가고, 충분히 머문 것만이 영글어 내 안에 깊이 새겨진다. 빠르게 통과시킨 문장들은 지식처럼 보이지만, 정작 삶의 자리에서는 꺼내지지 않는다. 알고 있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스쳐 지나간 것이었다. 그 분이 문장 앞에서 느낀 것은 그 문장이 자신의 하루하루와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삶으로 겪는 사람만이 아는 무게다.

며칠이 지나도 브뤼크네르의 문장은 내내 나를 따라왔다. 처음엔 참 빛나는 선언이라고 느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그 문장이 다르게 읽혔다. 불가능에 도전하라는 외침이 아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끝까지 하라는 말이었다. 여든을 넘기고도 책을 읽고 이 자리에 나오는 그 분의 모습이, 어쩌면 그 외침에 대한 가장 정직한 답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변한 것인지, 문장이 기다려준 것인지 끝내 알 수 없었다. 이때 독서는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사건이 된다. 책을 덮은 뒤에도 읽기는 내 몸 안 어딘가에서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런 시간들을 몸 안에 천천히 쌓아가는 일이다. 나는 요즘 읽다가 자주 멈춘다. 한 문장 앞에 오래 앉아 이해하려 서두르지 않고, 문장을 음미하며 내 안에 스며들기를 기다린다. 기다림이 때로는 답답하고 때로는 고요하다.

그럼에도 그 고요 안에서, 나는 여전히 질문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실립니다.이 글을 쓰는동안 나는 몇번이고 멈추었다. 문장을 고르다가, 그 분의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그 분은 지금 더이상 독서모임에 나오시지 못한다. 그러나 그 분이 그날 멈추었던 자리는 아직도 내 안 어딘가에 머물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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