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긋한 차 내음과 함께, 이곳저곳 둘러본 하동에서의 2박 3일
"내년 봄에 뵐게요."
지난 2025년 9월, 코엑스에서 진행한 차문화박람회 부스에서 사장님께 들은 말이다.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합석하기도 하고 또 떠나가기도 하는 그 날의 찻자리가 여전히 마음 속에 남아있다. 강력한 인연보다는 느슨하고 얕은 인연이 오히려 오래 간다고 하던가.
그 날 사장님은 내게 하동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해주셨고, 우리는 내년 봄에 볼 수 있길 고대하며 찻자리를 마무리 지었다. 그때 봄에 보자던 말이 내게 신호를 보내고 있던 걸까? 그 날 부스에서 구입한 세작이 봄이 시작되자 딱 동이 났다. 세작이 나를 부른다. 하동에 오라고. 그렇다면 난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4월이 되기 무섭게 2박 3일 하동 여행을 떠났다.
하동이 차로 유명한 이유
경상남도 하동은 국내 최대의 차 산지다. 지리산과 섬진강이 만나고, 온화한 날씨 덕에 차나무가 자라기 좋은 환경이다. 실제로 하동 이곳저곳을 구경했을 때 구석구석 자리 잡고 있는 차나무를 발견할 수 있는데, 특히 4월과 5월은 하동을 여행하기 좋은 달이다. 따사로운 햇살 속에서 푸른 차나무와 하동의 매력을 온전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 기간에는 직접 찻잎을 따서 녹차를 만드는 체험을 할 수 있으니, 하동 여행을 계획 중인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체험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
삼성궁
ⓒ 최주연
신비로운 분위기의 삼성궁
첫날 하동에 도착해 재첩국을 먹고 향한 곳은 삼성궁이다. 사전 지식 없이 어머니가 궁금해 한다는 이유로 그곳에 동행했다.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삼성궁은 단군, 환웅, 환인 등 고조선의 건국 신화의 주역을 모시는 곳이라고 한다. 차를 타고 올라갔는데, 꽤나 높은 고도에 위치해 있어 귀가 잠시 먹먹해 지기도 했다. 도착하니 우리 말고도 여러 단체 여행객들이 입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
삼성궁
ⓒ 최주연
입장하자마자 '산자락에 이런 곳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광활한 돌탑들이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넓은 연못과 탁 트인 풍경은 어쩐지 경건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이곳을 여유 있게 구경하면 한 시간 반 정도가 소요 된다고 한다.
입장 마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각에 들어갔던 터라 한적할 거라 생각하지만, 넓은 삼성궁 안에는 꽤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생각보다 경사가 있고 걷는 길이 길게 이어져 있기 때문에 방문 계획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꼭 운동화를 신고 가시길 바란다.
▲
삼성궁, 다람쥐
ⓒ 최주연
주변에는 돌탑이 가득했다. 오래 전 지어진 곳일 텐데, 이 많은 돌들은 다 어디서 온 걸까? 그렇게 천천히 구경하다 보니 신비스러운 삼성궁 분위기에 묘한 기분을 느꼈다. 삼성궁에는 다람쥐가 참 많았다. 이렇게 많은 다람쥐를 한번에 많이 본 경험은 처음이다. 한참을 걸으며 수많은 돌탑과 다람쥐를 구경하고, 단군을 모시는 절을 보다 보면 어느새 내려오는 길이 보인다. 십이지신을 따라 내리막길을 걸으면 탁 트인 삼성궁 전경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다. 이 날 하동의 밤하늘은 별로 가득했다.
▲
하동의 차밭
ⓒ 최주연
하동하면 '차'
이튿 날 눈이 떠지기 무섭게 아침 밥을 먹고 차 밭으로 향했다. 이번 여행길에서는 새로운 차밭을 방문하는 게 목표였다. 살랑살랑 온화한 하동의 이튿날 날씨는 걷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 날씨를 동력 삼아 이 근방에서 꽤나 유명한 차밭을 방문했다.
차밭을 향해 가는 길은 꽤나 험난했다. 차밭의 특성상 꽤나 높은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올라가는 경사가 이렇게 가파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으로 차를 타고 차밭을 올랐다. 고즈넉한 산골짜기에 위치한 차밭의 풍경은 보기만 해도 숨이 탁 트이는 듯 했다.
4월, 봄의 시작을 알리는 달이다. 그렇다면 어떤 차를 먹어야 할까. 가장 처음 나오는 차인 '우전'을 추천한다. 우전은 한 해 중 가장 이른 봄에 처음으로 따는 차다. 그래서 첫물차라고 부르기도 한다. 매우 귀한 차라고 볼 수 있다. 우전을 시키고 잭살도 시켰다. 잭살은 홍차의 일종인데, 경상남도 하동 지역에서 생산되는 한국의 전통 홍차라 볼 수 있다.
▲
하동의 잭살
ⓒ 최주연
먼저 나온 우전을 한 입 마셨다. 부드럽게 넘어가며 약간의 씁쓸한 맛이 뒷맛의 여운을 남긴다. 봄을 알리는 차로 제격이다. 차의 매력은 따뜻한 물에 여러 번 우려 마실 때마다 맛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세상 아래 같은 찻자리는 없다는 걸 인지하며 한 잔 한 잔 소중하게 마셨다. 그 다음으로는 잭살을 마셨다. 일반적으로 녹차보다는 홍차가 더욱 부드러운데, 잭살 역시 그러했다. 부드러움과 달큰한 향이 뒤에 느껴졌다.
찻자리를 천천히 즐기는 와중 어디선가 왜옹~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하고 창밖을 내려다보니 이 높은 산자락에 고양이가 있었다. 말 많은 고양이 덕에 가게 안의 사람들이 모두 고양이에게 한마디씩 건넸다. 고양이는 차밭 밑, 적당한 햇빛이 들어오는 테라스에 누웠다. 찻자리의 특별 게스트인 고양이와 함께 하니 여기가 무릉도원 그 자체였다.
▲
하동야생차 박물관으로 향하는 길
ⓒ 최주연
하동 야생차 박물관
다음 목적지인 쌍계사로 향하기 전, 바로 밑에 위치해 있는 야생차 박물관에 방문했다. 입구에서 곰이 찻잔을 들며 우리를 환영해주었다. 박물관에는 세계 차의 종류, 다구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시대에 따라 차를 마시는 법이 설명되어 있어서 흥미로웠다.
우리가 방문한 날은 2층이 전시 준비 중이라 올라갈 수 없었지만 쉬었다 가는 공간으로 잠시 둘러보기 좋았다. 또한 이곳에서는 다례 체험, 찻잎 따기, 차 덖음 체험 등 다양한 체험을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할 수 있다. 홈페이지에서 예약할 수 있고, 특히 오는 5월부터 찻잎 따기와 차 덖음 체험이 가능하니 관심 있다면 한 번쯤 살펴보는 것을 추천한다.
▲
하동 쌍계사
ⓒ 최주연
우리나라 최초의 차시배지, 쌍계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쌍계사는 신라 흥덕왕 3년(828)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대렴(大廉)이 신라로 돌아올 때 가져온 차나무의 종자를 왕명에 의하여 지리산 자락에 심었다고 한다. 그곳이 바로 쌍계사고, 그렇게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차시배지로 자리매김했다. 쌍계사를 둘러보면 곳곳에 차나무를 발견할 수 있는데, 온화한 이곳의 기온이 차나무가 자라기에 더없이 적합한 곳인 듯하다.
마침 벚꽃 시즌이라 쌍계사에는 사람들이 북적였다. 쌍계사는 사계절 모두 아름답지만, 특히 오는 길에 볼 수 있는 벚꽃길이 참 아름다워 봄에 더욱 인기가 많은 사찰이다. 쌍계사에는 높이 뻗은 전나무와 대나무가 많았는데 보기만 해도 속이 시원해지는 듯했다. 또한 쌍계사 안에는 계곡이 있는데, 올라갈 체력이 남아있지 않아 멀리서 물이 흐르는 소리를 귀에 담았다. 청량한 소리가 귓가를 맑게 울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사찰에 머물렀다.
▲
시원한 냉면과 지리산 삼겹살
ⓒ 최주연
있어야 할 건 다 있고요, 없을 건 없답니다 화개 장터
쌍계사를 내려오며 들린 곳은 그 유명한 화개장터! 마침 점심 시간인 터라 밥을 먹고 구경할 참이었다. 공영 주차장에 차를 대곤, 찾아봤던 음식집을 향해 갔다. 웬걸, 죄다 문을 닫았다. '브레이크타임', '개인 상의 이유로 휴무…' 아쉽지만 뜻하지 않은 곳을 향해 가는 곳도 여행의 묘미 아닐까. 열려 있는 음식점을 찾아 발걸음이 멈춘 곳은 지리산 삼겹살 집이었다.
더워진 날씨에 삼겹살과 함께 냉면을 먹으니 행복 그 자체였다. 배부르게 점심을 먹고 본격적으로 일대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근처에 유명하다는 밤파이도 사고, 이름만 들어도 아는 쌍계명차가 이곳에 있다길래 방문했다. 따뜻하게 금잔화를 시켜 마셨다. 계단식으로 이루어진 좌식 테이블에 차창 통유리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잠시 숨을 돌리고서는 화개장터 시장 구경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작은 규모의 시장이었지만, 정말 있을 건 다 있었다. 이리 저리 시장을 구경하다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특히 차로 유명한 하동에 위치한 시장답게 다른 지역의 시장보다 다구와 다기들을 많이 구경할 수 있어서 좋았다.
▲
하동, 봄
ⓒ 최주연
별천지 하동
하동을 구경하다 보면 심심치 않게 '별천지'라는 단어를 볼 수 있다. 첫 날에는 단순히 '아 별이 많아서 그런가?'라고 생각했다. 도시의 빛이 많이 없기에 밤마다 별을 잔뜩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숙소 발코니에 앉아 별 구경을 했다. 하동은 도시 빛이 거의 없기 때문에 별 관측지로 손에 꼽히는 곳이다. 특히 방문한 숙소도 깊은 산자락에 있었기에 별을 보기엔 최적이었다.
하동에서의 마지막 날은 조용히 주변을 눈에 담고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 별천지의 뜻을 곰곰이 생각했다. 별천지(別天地)는 특별히 경치가 좋아 이상향으로 느껴지는 곳을 뜻한다. 첫 날에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하동 곳곳을 방문하며 왜 이곳이 별천지라고 불리는지 알 것만 같았다.
하동엔 엄청 대단하고 경이로운 풍경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는 곳마다 자연의 경치를 느낄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무척 특별하다. 특별해서 소중하게 여겨지는 곳이다. 별천지 하동, 4월부터 대한민국 반값 여행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반값으로 여행하고, 고즈넉한 하동의 별천지를 차(茶)와 함께 즐겨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