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발 지정학적 리스크 확산에 국제 전시·컨벤션 연쇄 취소 및 연기
고유가·이동 제한…팬데믹 이후 회복되던 마이스 시장 위축 우려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전쟁이 중동 전역으로 확산하면서 일정을 취소한 세계 최대 암호화폐 행사 ‘TOKEN 2049’ 지난해 행사 모습. [사진 로이터/연합뉴스]
[이선우 이데일리 The BeLT 센터장]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전쟁 여파로 아랍에미리트(UAE), 사우디아라비아, 바레인, 카타르 등 중동 지역에서 열리던 전시·박람회, 국제회의 등 행사들이 대규모 취소·연기 사태를 맞고 있다. 지난달 28일 미국·이스라엘의 대규모 공습으로 시작된 전쟁이 장기전 가능성을 띠면서 사태를 관망하던 행사들도 줄줄이 취소·연기 행렬에 가세하고 있다. 개전 초반 ‘라마단’ 비수기와 겹쳐 피해가 크지 않았지만, 이달 말부터 본격적인 성수기에 접어들어 행사 취소·연기로 인한 피해는 갈수록 늘어날 전망이다.
카타르 컨설팅 기업 노스본 어드바이저리에 따르면 미국과 이스라엘, 이란 간 전쟁 발발 이후 중동 지역에선 100여 건의 행사가 취소·연기된 것으로 나타났다. 국제전시이벤트서비스연맹은 최근 “중동 지역 내 긴장 상황이 지속되면서 항공·물류 안정성을 담보할 수 없는 상태”라며 “중동 전역에 대한 여행경보(여행제고·출국권고) 발령으로 원활한 국제 행사 개최가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한때 폐쇄됐던 중동 지역 영공과 항공 노선은 현재 운항을 재개한 상태지만, 여전히 높은 불확실성으로 운항 횟수와 편수를 줄이거나 우회 노선을 이용하고 있다. 일례로 영국항공은 도하행 노선은 내달 30일까지, 두바이와 바레인, 텔아비브, 암만 등 항공편은 5월 말까지, 아부다비 노선은 오는 10월까지 운항 중단을 결정한 상태다.
스포츠·비즈니스 이벤트 줄줄이 취소·연기
국제자동차연맹(FIA)는 최근 세계 최대 자동차 경주대회 ‘포뮬러1’(F1) 바레인 사키르와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서 열릴 예정인 그랑프리 대회를 전격 취소했다. 호주 멜버른 그랑프리에 이어 4월 12일과 19일 각각 열릴 예정이던 대회는 최근 긴장 상황이 중동 전역으로 확산하면서 결국 취소 사태를 맞았다. FIA는 바레인과 사우디아라비아 대회 취소에 앞서 지난 8일 호주 그랑프리 개막을 앞두고 열려던 카타르항공 후원의 VIP 행사와 카타르 도하 챔피언십(WEC)도 취소했다.
F1 그랑프리 대회를 소유한 ‘리버티 포뮬러1’은 바레인과 사우디아라비아 대회 취소로 올 시즌 레이스 횟수가 24개에서 22개로 줄면서 주가가 10% 하락했다. 스테파노 도메니칼리 F1 회장 겸 최고경영자는 공식 브리핑을 통해 “사우디아라비아가 강행 개최를 원했지만, 현지 상황을 고려할 때 대회 취소만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이란의 무차별 보복 공격의 3분의 2가 집중된 두바이에선 예정됐던 글로벌 비즈니스 이벤트가 줄줄이 취소·연기되고 있다. 전자상거래 마케팅 분야 세계 최대 국제 행사인 ‘어필리에이트 월드 글로벌’은 이달 2일 개막을 불과 이틀 앞둔 상태에서 취소됐다. 갑작스런 취소로 개최지인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 현지에 강연과 공연, 전시 등을 위한 장비와 인력 투입을 마친 주최사인 홍콩 VCEGH는 수십억 원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VCEGH 측은 “언제 어디서 미사일이 날아올지 모르는 극도의 긴장 상황으로 100여 개국 7000여 명에 달하는 참가자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는 상태”라며 취소 이유를 밝혔다.
세계 최대 암호화폐 행사 중 하나인 ‘토큰(TOKEN) 2049’는 4월 29일과 30일로 예정된 올해 행사를 내년 4월 21일과 22일로 연기했다. 개전 초반 “일정 변경은 없다”던 주최측은 이란의 보복 공격이 두바이에 집중되면서 결국 행사 연기로 입장을 바꿨다. 두바이 마디나트 주메이라 호텔에서 열리는 행사엔 150개 국가에서 1만 5000여 명, 200개 이상의 전시업체가 참가할 예정이었다.
3월 30일과 31일 두바이에서 JP모건과 스위스 사모펀드 파트너스 그룹이 열려던 ‘중동·북아프리카(MENA) 콘퍼런스’는 일정을 5월로 바꾸면서 개최지를 스위스 취리히로 변경했다. 토큰 2049에 이어 5월 1일과 2일 두바이에서 열릴 예정이던 블록체인 국제 콘퍼런스 ‘TON 게이트웨이’는 아예 올해 행사를 취소했다. 두바이 코카콜라 아레나에서 75개국 1만 30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6일부터 열릴 예정이던 세계 최대 규모 강연 행사 ‘메가 캠퍼스 서밋’은 일정을 9월로 연기한 상태다.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항에서 열린 지난해 ‘두바이 보트쇼’ 모습. 올해 4월 8일부터 열릴 예정이던 행사는 11월로 일정을 연기했지만, 개최 여부는 불투명한 상태다. [사진 두바이월드트레이드센터]
고유가에 항공·물류비 증가…행사 수요 감소 우려
그나마 학술대회, 콘퍼런스는 원격 화상회의로 대체가 가능하지만, 제품과 여객 운송이 수반되는 전시·박람회, 치열한 경쟁을 뚫고 유치한 국제회의는 줄줄이 취소 사태를 맞고 있다. 전체 사업 중 중동 비중이 12%에 달하는 시가 총액 2조 원대의 세계 최대 전시 주최사 인포마(Informa)는 이달 들어 주가가 7% 가까이 급락했다.
이달 말 열릴 예정이던 ‘도하 패션쇼’는 카타르 정부가 전시컨벤션센터, 호텔 등에서 열리는 다중 행사에 대한 전면 중단 조치를 내리면서 일찌감치 취소됐다. 세계대중교통협회(UITP)는 다음달 두바이에서 열려던 대중교통 분야 세계 최대 국제회의 ‘UITP 서밋’를 취소하고 차기 행사를 내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기로 했다.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사흘간 아부다비에서 열릴 예정이던 마이스(MICE) 전문 박람회 ‘M&I 엑스포’, 국제테마파크협회가 이달 31일부터 아부다비에서 열려던 중동 지역 최초 ‘국제 테마파크 엑스포’는 일정을 내년 4월로 미루면서 사실상 올해 행사를 취소했다. 야곱 월 국제테마파크협회 회장은 최근 자신의 SNS를 통해 “행사 연기는 300개가 넘는 기업의 안전 확보를 위한 불가피한 결정”이라며 “오랜 기간 준비해온 행사를 조명 스위치를 올리고 내리는 듯 간단히 취소·연기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1조7000억달러 건설 프로젝트를 위해 5월 열려던 건축 박람회 ‘빅5 콘스트럭트 사우디’, 다음달 8일 두바이항 일대에서 개막하는 ‘두바이 국제 보트쇼’는 각각 일정을 올 9월과 11월로 미뤘지만, 개최 여부를 장담할 수 없는 처지다. 오는 6월로 예정된 ‘두바이 호텔쇼’는 아직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진 않았지만, 페어몬트 더 팜 등 현지 호텔이 이란의 미사일, 드론 공격을 받으면서 개최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문제는 전쟁으로 인한 행사 취소·연기 여파가 중동 지역에만 국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안전 우려 외에도 유가 급등으로 늘어난 물류·항공비 부담이 국제 전시컨벤션 수요 감소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실제로 이달 초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MWC’(모바일 월드 콩그레스)는 중동 지역 영공 폐쇄에 따른 항공편 결항으로 1만여 명 가까운 바이어가 참가를 취소했다.
그레고르 비슈코프 국제 전시이벤트서비스연맹 사무총장은 “대화와 연결, 협력이 기본이자 주된 목적인 전시컨벤션 행사에 갑작스러운 영공·해상 폐쇄로 인한 화물·여객 운송 차질은 치명적인 리스크”라며 “중동 지역 내 긴장 상황이 지속할 경우 코로나19 팬데믹에서 벗어나 회복세에 있던 전시컨벤션, 이벤트 시장이 다시 위축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