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감시 완전히 분리
선진국과 격차는 여전
“정보 충분히 공유해야”
LG전자의 첫 사외이사 출신 이사회 의장 강수진 사외이사. [사진 LG전자]
[이코노미스트 정길준 기자]
삼성전자에 이어 LG전자까지 사외이사 의장 체제를 갖추면서 이사회 ‘거수기 시대’의 종말을 선언했다. 경영진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독립적 지배구조를 확립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 다만 형식적인 제도 도입을 넘어 기업의 진정성이 담긴 운영이 뒷받침돼야 독립 이사회를 실현할 수 있다는 진단도 나온다.
LG전자, 첫 사외이사 의장 선임
LG전자는 지난 3월 23일 이사회 의장을 사외이사 출신으로 선임하며 새로운 지배구조 표준을 정립했다. 강수진 사외이사는 첫 사외이사 출신 이사회 의장직에 올랐다. 여기에 회사는 류재철 최고경영자(CEO)를 단독 대표이사로 선임하며 경영과 감독을 명확히 분리했다. LG전자 측은 “이사회의 독립성과 투명성을 제고해 기업 지배구조를 고도화하겠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이로써 LG전자 이사회는 경영진과 분리돼 독립적으로 주요 안건을 심의하고 의사결정 하는 경영 감독 체계를 구축하게 됐다. 류재철 CEO는 경영진인 동시에 이사회 구성원으로서 회사의 핵심 안건에 공식적인 의결권을 행사하며 책임경영을 이행한다.
이러한 변화는 LG전자뿐 아니라 구광모 회장이 주도하는 LG그룹 전반의 움직임으로 확산하고 있다. LG유플러스 역시 남형두 사외이사를 차기 이사회 의장으로 선임하며 지배구조 개선에 박차를 가했다. LG유플러스가 사외이사를 의장으로 선임한 것은 창사 이래 처음이다.
LG화학도 조화순 사외이사를 첫 여성·사외이사 의장으로 선임했다. 연세대 정치외교학 교수인 조 의장은 과학기술 정책과 미래 거버넌스(지배구조) 분야의 전문가로 평가받는다. LG화학은 이번 결정으로 이사회 의장과 대표이사를 분리하게 됐으며, 주주와 이사회 간의 ‘거버넌스 미팅’ 등 주주 소통 방안을 올해 안에 마련할 계획이다.
신제윤(오른쪽)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 [사진 연합뉴스]
삼성전자, ‘사외이사 의장’ 전통 안착
LG그룹이 대대적인 변화를 꾀하고 있다면, 삼성전자는 일찌감치 이사회 독립성을 강화하며 변화를 주도해 왔다. 2024년 사외이사로 합류한 신제윤 사외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다. 박재완 의장과 김한조 의장에 이어 사외이사가 의장을 맡는 세 번째 사례다. 삼성전자는 이미 2018년 이사회 의장과 대표이사를 분리했으며, 2020년부터 사외이사 의장 체제를 도입했다.
이처럼 대기업들의 적극적인 행보에도 불구하고 국내 기업 전반의 상황은 여전히 갈 길이 멀다. 한국거래소가 유가증권시장에 상장한 기업 549곳의 2025년 지배구조 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사외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는 곳은 13.6%에 불과했다. 전년 대비 고작 0.5%포인트 상승한 수치다.
특히 기업 규모별 격차가 뚜렷했다. 자산 2조원 이상 기업의 준수율은 22.7%인데, 5000억원 이상 기업은 4.2%에 그쳤다. 자산 규모에 따른 준수율 격차는 18.5%에 달해 중견·중소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반면 선진국은 독립적 이사회 체제가 빠르게 안착하고 있다. 글로벌 컨설팅 회사 스펜서 스튜어트에 따르면 미국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지수 편입 기업 중 독립적인 이사회 의장 비중은 2020년 34%에서 2025년 42%까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이창민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는 “이사회의 기본 역할은 ‘체크 앤 밸런스’(견제와 균형)다. 국내 기업의 사외이사 의장 비율은 턱없이 낮은 수준”이라며 “CEO가 이사회 의장을 맡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지만 이사회 스스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이 더욱 큰 문제”라고 꼬집었다.
서울 여의도 LG전자 사옥. [사진 연합뉴스]
‘양날의 검’ 된 독립성
사외이사 의장 체제가 반드시 경영 성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KT 이사회는 사외이사보다 더 강하게 독립된 ‘독립이사’ 중에서 의장을 선임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오히려 이 구조가 ‘옥상옥’으로 변질되는 결과를 낳았다.
앞서 KT 이사회는 부문장급 경영 임원의 임명 및 면직, 주요 조직 개편 과정에서 이사회의 사전 심의 및 의결을 거치도록 규정을 강화했는데 CEO의 고유 권한인 인사권까지 넘본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결국 주요 주주인 국민연금까지 과도한 경영 개입이라는 우려를 표하자 이사회는 한발 물러섰다. 이에 박윤영 KT 신임 대표이사는 취임과 동시에 이사회와의 힘의 균형을 맞추는 과제를 떠안았다.
해외에서도 경영진과 사외이사 의장 체제 이사회가 갈등을 빚은 사례가 있다. 비만 치료제 ‘위고비’로 알려진 덴마크 제약사 노보 노디스크는 지난해 CEO 선임 방식을 둘러싸고 경영진·대주주와 이사회가 정면충돌했다. 최대 주주인 노보 노디스크 재단은 일라이 릴리의 경쟁약 ‘마운자로’에 맞서 체질 개선 속도를 높이자고 요구했다. 반면 사외이사 다수는 새로운 역량을 일부 추가하면서 연속성을 중시하는 ‘속도 조절론’을 고수했다. 결국 양측이 합의하지 못하면서 의장을 비롯한 사외이사 7명이 한꺼번에 물러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사회가 집단 퇴진하는 광경은 시장의 우려를 부추겼다.
전문가들은 사외이사가 경영의 파트너로서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이 우선돼야 한다고 조언한다. 조명현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이사회 의장은 단순히 회의를 주재하는 사회자가 아니라 경영진의 성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그에 따른 보상 결정을 주도해야 하는 막중한 자리”라며 “회사는 사업 계획 등 핵심 정보를 사외이사들에게 충분히 공유해 그들이 신속하고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실질적인 도움을 줘야 진정한 거버넌스 혁신이 완성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