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해부학자 “인체, 신비는커녕 진화적 땜질” 주장/진화적 타협의 역사 보여주는 부위…척추, 골반, 눈, 치아, 코(부비동), 귀(주변 근육), 목의 특정 신경 등 지목
임신한 여성이 버스를 타고 이동 중이다. 임산부가 출산 때 겪는 고통(산통)은 인류 진화 과정의 직립 보행과 관련이 있다. 여성의 좁은 골반은 효율적인 보행에는 도움이 되지만 태아의 큰 머리가 임산부의 자궁을 통과하기에는 너무 좁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우리 몸이 예술 작품처럼 아름답고 경이롭다는 뜻에서 '인체의 신비'라는 표현을 종종 쓴다. 인체의 구조는 뼈, 근육, 혈관, 장기 등이 복잡하고 정교하게 어울려 작동하며 인체에는 생명의 근원적인 신비함이 깃들여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사람의 몸은 '인체의 신비'라는 표현에 걸맞은 완벽한 설계의 결과가 아니라 진화적 타협에 의한 '누더기(patchwork)'라는 이색적인 주장이 나왔다. 인류의 진화적 타협 때문에 사랑니가 골칫거리가 되고, 코의 뼈 속 빈 공간인 부비동이 쉽게 막히고 감염되기 쉬워졌다는 것이다. 또한 눈과 목의 특정 신경이 뒤틀리는 바람에, 눈에는 맹점이 생기고 목 부위는 수술 때 손상 위험이 높아지는 등 인체가 누더기처럼 변했다는 주장이다.
영국 브리스톨대 루시 E. 하이드 해부학 강사는 호주 비영리 매체 '더 컨버세이션'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인체는 결점이 없는 우아하고 효율적인 기계가 아니라, 수백만 년에 걸친 진화적 땜질로 이뤄진 타협점의 모자이크에 가깝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이 칼럼에 따르면 진화는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서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을 수정하는 과정이다. 인체 구조의 많은 부분이 완벽과는 거리가 먼 '그저 적당한' 해결책일 뿐이다.
우리가 겪는 흔한 병 가운데 추간판탈출증(디스크) 등 상당수는 이런 진화적 제약에서 비롯된다. 진화적 타협의 역사를 잘 보여주는 인체 부위로는 척추, 골반, 눈, 치아, 코(부비동), 귀(귀 주변의 작은 근육), 목의 특정 신경 등을 꼽을 수 있다.
진화적 타협의 역사가 가장 고스란히 드러나는 인체 구조는 바로 척추다. 현대인의 척추는 나무 위에서 생활하던 네 발 달린 조상으로부터 거의 진화하지 않았다. 그 옛날의 척추는 유연한 빔(beam) 역할을 하며 척수 보호와 원활한 움직임을 맡았다.
하지만 인간이 직립보행을 시작하면서 상황이 사뭇 달라졌다. 척추는 유연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체중을 수직으로 지탱해야 하는 정반대의 임무를 맡게 됐다. 현대인이 고통을 겪는 허리통증(요통), 추간판탈출증(디스크) 등 병은 척추가 원래 설계 목적이 아닌 일을 수행하며 발생하는 과부하의 결과다.
골반도 비슷하다. 좁은 골반은 효율적인 보행을 돕지만 태아의 큰 머리가 임산부의 자궁을 통과하기에는 너무 좁다. 이 때문에 여성은 극심한 출산의 고통(산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동의 효율성과 뇌 크기 사이의 이런 팽팽한 긴장은 인류가 서로를 돕는 사회적 행동을 발달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시각 구조도 기묘하다. 인간의 망막은 신경 섬유층이 광수용체 앞에 있는 '역방향' 구조다. 빛이 신경층을 통과해야 세포에 도달하며, 이들 신경이 뇌로 빠져나가는 통로에는 시세포가 없어 '맹점'이 발생한다. 뇌가 이 빈틈을 메워주기 때문에 평소에는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두 눈을 뜨고 있으면 맹점을 느끼지 못하지만 한 쪽 눈만 사용하거나 특정 맹점 실험을 할 때 시야의 일부가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치아는 진화의 속도가 환경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사례다. 과거 질기고 딱딱한 음식을 씹기 위해 발달했던 큰 턱은 식단이 부드워지면서 점차 작아졌지만, 치아의 개수는 그대로 유지됐다. 그 결과 세 번째 어금니인 '사랑니'가 돋아날 공간이 부족해져 염증과 통증을 일으키는 골칫거리가 됐다. 또한 상어와 달리 평생 두 세트의 치아(유치와 영구치)만 가지는 구조는 치아 상실에 취약한 한계를 지닌다. 상어는 이빨을 평균 300개 갖고 있고 이빨이 빠져도 계속 다시 나기 때문에 평생 많은 이빨을 쓸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코 뼈 안의 빈 공간인 부비동은 배출구가 코로 바로 연결돼 있어 쉽게 막히고 감염되기 쉽다. 부비동의 기능은 뚜렷하지 않다. 두개골의 무게를 줄이거나 목소리 공명에 영향을 줄 수도 있고, 법의학적인 신원 확인에 활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부비동의 배액 통로(몸안의 분비물, 농양, 혈액 등을 밖으로 빼내는 길)는 코로 직접 연결돼 있다. 이 때문에 부비동은 자주 막히고 감염에 취약하다. 이는 기능적인 적응이 아니라 발달 과정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귀 주변의 작은 근육들은 이젠 거의 쓸모없는 흔적으로만 남아 있다. 과거 포유류 조상들은 이들 귀 근육을 움직여 어떤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찾았다. 맹장(충수)은 진화 과정에서 완전히 쓸모없는 잔재로 여겨졌지만, 최근 미미하나마 면역 기능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맹장에 염증이 생기면 맹장염(충수염)을 일으켜 대부분 수술을 받아야 한다.
목에 있는 특정 신경(되돌이후두신경)은 지능적인 설계와는 거리가 멀다. 뇌와 후두를 연결해 말하기와 삼키기를 돕는 이 신경은 가장 직선적인 경로를 택하는 대신, 가슴까지 내려가 대동맥을 한 바퀴 감은 뒤 다시 목으로 올라온다. 어류 조상의 아가미 주위를 지나던 신경 경로가 목이 길어지는 진화 과정을 거치며 재배치되지 않고 길게 늘어나기만 해서 그렇다. 이런 비효율적인 경로 탓에, 수술 때 이 부위가 손상될 위험이 높다.
하이드 해부학 강사는 "인체는 완벽한 걸작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그때그때 쓸모 있는 자원을 바꿔가며 버텨온 진화의 살아있는 기록"이라고 강조했다. 허리 통증, 출산의 고통, 사랑니 등은 우연한 불행이 아니라 우리가 거쳐온 진화적 역사의 필연적인 결과물이다.
[자주 묻는 질문]
Q1. 목에 있는 특정 신경(반회후두신경)이 왜 바로 연결되지 않고 가슴까지 내려갔다 올라오나요?
A1. 척추동물의 조상은 물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 형태였습니다. 약 3억 8천만 년 전~5억 년 전 고생대의 조상에는 목이 없었기 때문에 이 신경이 심장 근처 혈관을 지나 후두로 가는 길이 아주 짧고 직선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진화 과정에서 목이 길어지면서, 신경이 혈관에 걸린 채로 고무줄처럼 길게 늘어나 버린 것입니다. '설계'가 아니라 '늘어난' 결과라 비효율적인 경로를 갖게 됐습니다.
Q2. 이 신경이 뒤틀려 있으면 어떤 위험이 있나요?
A2. 경로가 불필요하게 길고 복잡하다 보니, 갑상선 수술이나 가슴 부위 수술을 할 때 의사가 신경을 건드릴 위험이 커집니다. 신경이 손상되면 목소리가 쉬거나 음식물을 삼키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이는 해부학적으로는 아주 '불운한 설계'라 할 수 있습니다.
Q3. 직립보행으로 인한 디스크 등 척추 질환은 진화가 덜 된 결과인가요?
A3. 진화가 덜 되었다기보다는 진화의 속도보다 환경의 변화가 빨랐기 때문입니다. 네 발 걷기에 최적화된 척추 구조가 수직 하중을 견뎌야 하는 직립보행의 요구를 단기간에 완벽히 충족시키지 못하면서 생긴 일종의 부작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