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AI와의 공존
"강력한 존재 있기에 계속 연마할 수 있어
AI 이길 순 없지만 의지·투혼은 인간의 것
'중국이라는 국가'와 상대하는 것 같아 부담
세계 1위 오래 하려 덜 예민해지려고 노력"
'바둑 세계 랭킹 1위' 신진서 9단이 지난달 27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에서 바둑돌을 들고 있다. 사진은 바둑판과 합성. 신 9단은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존재(인공지능)가 있어 계속 연마할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임지훈 인턴기자
구글 딥마인드의 바둑 인공지능(AI) 알파고와의 대결에서 이세돌 9단이 패배한 2016년 3월. AI 등장 이후 바둑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사람들은 AI가 제시하는 승률을 보고 AI가 추천하는 수를 둔다. 대부분의 프로 기사도 AI를 쓴다. 신진서 9단은 AI를 가장 '성공적으로' 터득한 기사로 꼽힌다. 2020년 이후 세계 랭킹 1위를 놓치지 않고 있는 그는 AI가 제시하는 정답과 유사한 바둑을 둔다고 해서 '신공지능'(신진서+인공지능)으로 불린다.
"AI를 이기는 건 불가능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계속 성장하는 것 같아요. 이길 수 없는 존재가 있다는 건 계속 연마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지난달 27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에서 진행한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신 9단은 이렇게 말했다. AI가 무한한 성장 동력이 되어준 덕분에 성장했고 앞으로도 성장할 거란 얘기다. 실제로 신 9단은 AI가 등장하기 전보다 더 많이 노력한다고 한다. "예전엔 기사들끼리 바둑하고, 복기하고, 사활을 풀었는데 'AI 공부'가 더해지면서 공부량이 늘었어요."
신 9단은 'AI 등장 이후 바둑의 재미가 덜해졌다'는 평가를 부정하지 않았다. "이기는 전투를 위한 수를 두다 보니 극단적이거나 도전적인 전투가 사라진 건 사실입니다." 바둑은 저마다 확립한 기풍을 토대로 길을 찾고 집을 짓는 '독창성' 때문에 사랑받았는데, AI 의존도가 커진 상황이 바둑의 미래를 어둡게 하진 않을까. 신 9단은 "그럼에도 인간이 두는 바둑은 계속 사랑받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AI에 없는 걸 인간은 가지고 있잖아요. 의지, 투혼, 스토리 이런 것들이요. AI를 쓴다고 기풍이 획일화됐다고 단정하긴 어려워요. AI 덕분에 오히려 바둑 배우기가 쉬워졌으니 세계화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다음은 'AI와의 공존'을 넘어 'AI를 통한 바둑 부흥'을 꿈꾸는 신 9단과의 일문일답.
그래픽=박종범 기자
-AI 이후 바둑계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이라는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프로 입문(2012년) 이후 AI를 접했으니 'AI 세대'라고 딱 잘라 규정하긴 어려울 것 같다. 어느 정도 기본기를 다진 상황에서 AI를 받아들였다. 다만 프로 세계만 놓고 보면 AI 수용 속도가 빨랐던 것 같다. 어떻게 하면 AI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가 승패를 좌우하는 시대다. 기사들끼리 바둑을 두고 연구하는 과거 방식의 공부도 여전히 필요하지만 AI를 이해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한국기원을 통해 구글에 알파고와의 대결 제안을 했다. 이길 수 없는 존재에 도전하는 건 어떤 마음인가.
"도전할 상대가 있으면 도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 재미있는 일 아닌가. (내가) 알파고를 이길 수 있을지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 같다. AI를 뛰어넘는 건 불가능하다. AI를 이겨야 한다는 목표를 세우지도 않는다. 다만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존재가 있으니 계속 성장할 수 있지 않나 싶다."
그는 2024년 발행한 저서 '대국'을 통해서도 자기 발전을 위한 동력으로서 AI의 역할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AI는 끊임없이 숙제를 주는 존재이고, 내가 게을러질 수 없게 만드는 1등 공신이다. 세계 1위에 올라서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건, 나보다 실력이 뛰어난 AI가 있는 덕분이다."
신진서 9단이 지난달 27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신 9단은 "예전엔 '지면 죽는 것'이란 생각으로 대국에 임했는데 그렇게 하면 오래 버티기 힘들 것 같다"며 "'흘러간 바둑은 흘러간 바둑'이라고 생각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 스물여섯인 신 9단은 서른다섯까지 세계대회에서 우승하기를 꿈꾼다. 임지훈 인턴기자
-AI가 바둑기사의 개성인 '기풍'을 획일화했다는 지적도 있다.
"바둑이 발전할수록 극단적인 기풍은 설 자리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 AI가 최적의 수를 제시하니 기사들의 선택이 어느 정도 수렴할 수밖에 없고, 대부분 승리할 확률이 높은 전투를 하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기풍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긴 어렵다. 나 또한 기풍이 옅어진 건 맞지만, 웬만하면 전투를 피하지 않는 '전투형 바둑'을 여전히 두고 있다."
알파고로 대변되는 AI를 처음 접했을 때 신 9단도 바둑 공부가 획일화될까 걱정했다. 그러나 이제는 인간이 두어 온 바둑과 AI가 제시하는 바둑 사이 어딘가 새로운 시대의 바둑이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AI를 통해 바둑을 배울 수 있게 됐으니 바둑의 세계화 가능성도 커졌다고 보나.
"도움이 될 것 같다. 예전엔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바둑을 배우기가 어려웠는데 이젠 그런 부분이 해소된 것 아닌가. 바둑이 대중화되지 않은 국가에서도 '고수'가 많아진 것으로 안다. 바둑에 대한 세계적 관심이 조금 더 커진 것 같다. 물론 아직 갈 길이 멀다."
-세계 랭킹 1위라는 타이틀에 대해 묻고 싶다. 부담감이 클 것 같은데.
"안 느끼는 줄 알았는데, 많이 느껴온 것 같고 느끼고 있는 것 같다. 특히 경기에서 지면 밥 먹을 때도 놀 때도 '왜 졌을까'라는 생각이 맴돈다. AI가 승률을 분석해주기 때문에 '여기 뒀으면 승률이 이랬다는데, 난 왜 그 생각을 못했나' 이런 생각도 자주 하게 된다. 다만 덜 예민해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예전엔 '지면 죽는 것'이란 생각으로 대국에 임했는데 그렇게 하면 오래 버티기 힘들 것 같다. 35세까진 세계대회에서 우승하고 싶다. 그래서 '흘러간 바둑은 흘러간 바둑'이라고 생각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신 9단은 책에서 '세계대회에서 10번은 우승하고 싶다'고 썼다. 그리고 이미 세계대회에서 9차례 이겼다. 그는 "세계대회 17번 우승 기록을 세운 이창호 9단을 뛰어넘긴 어려울 것 같다"면서도, 최소 9년은 더 세계 랭킹 1위 타이틀을 지키길 원했다. 신 9단은 올해 26세다. 35세를 목표로 정한 건 "서른은 아쉽고 마흔은 욕심인 것 같다"는 단순한 이유에서다. 올해 농심배에서 개인 통산 21연승으로 자신이 보유한 최다 연승 기록을 깨며 6연패를 달성한 건 그래서 더 의미가 컸다고 한다. 지난해 11월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16강에서 탈락하며 잃은 자신감과 안정을 회복하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지난달 7일 신진서 9단이 중국 선전에서 열린 제27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에서 우승한 뒤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해 인터뷰하고 있다. 연합뉴스
-가장 위협적인 선수 또는 그런 스타일이 있나.
"굳이 한두 명을 꼽는다면, 딩하오(세계 랭킹 2위)나 왕싱하오(세계 랭킹 3위)일 것 같다. 그런데 실은 '중국이라는 국가'를 상대로 싸우고 있는 것 같다. 중국엔 잘하는 기사가 너무너무 많다. 이 선수는 진짜 세다 싶어도 그 선수를 이기는 또 다른 선수가 계속 나타난다. 1위 자리엔 한국 기사가 있지만 중국엔 1등만 없을 뿐이다. 한국이 세계 바둑계를 압도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1월엔 고향인 부산에서 제1회 신진서배 전국 어린이 바둑대회가 열렸다. '바둑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평소 생각이 반영된 건가.
"부산시바둑협회와 '신진서 사랑회'(팬클럽)가 주최·주관해주신 덕분에 대회를 열게 된 것이지만, 대회에 출전하고 우승하면 바둑에 더 빠지는 계기가 되는 건 분명하기에 대회 개최 제안을 큰 고민 없이 수락했다. 대회에 집중해야 하는 지금은 힘들겠지만 바둑의 저변을 넓히고 바둑이 더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많은 역할을 하고 싶다. 조훈현 사범 등이 쌓아둔 유산 위에 바둑이 서 있지만 침체된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