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에 남은 '디스플레이' 역사
한계 돌파 기업들의 변신 노력
불편한 결정도 과감하게 해야
삼성SDI가 지난해 '인터배터리 2025'에서 공개한 46파이 배터리 라인업. 삼성SDI 제공
1969년, 삼성그룹은 경기 수원시에 라디오와 TV 완제품을 생산하는 거대한 복합단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TV의 디스플레이 장치인 브라운관(CRT)의 핵심 부품인 유리 벌브와 전자총, 그리고 튜너 등을 만드는 부품사와 이를 조립해 TV를 생산하는 수직계열화된 산업단지였다. 당시 TV와 라디오를 만들던 회사는 삼성전자공업, 오늘날 삼성전자 DX부문의 일부였으며 CRT를 생산했던 회사는 삼성-NEC였다. 이 회사는 나중에 사명을 삼성전관으로 바꾼다.
CRT 시장의 강자였던 삼성전관은 2000년대 초 디스플레이 기술의 중심이 액정표시장치(LCD)로 급격히 옮겨가던 시기에 큰 시련을 겪었다. CRT 시장은 빠르게 축소되었고 차세대 디스플레이 기술로 주목받았던 플라스마 디스플레이(PDP) 사업도 LCD에 밀려 결국 문을 닫아야 했다. 사업화에 성공하지 못했던 소형 LC 모듈 사업이나 그 단계에도 이르지 못했던 많은 프로젝트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결국 삼성그룹의 디스플레이 사업은 2012년 삼성디스플레이로 일원화되었다.
이 무렵 삼성전관은 삼성SDI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리고 지금 이 회사 매출의 80% 이상은 2차전지 사업에서 나오고 있다. 그런데도 삼성SDI는 아직 회사 이름에 디스플레이를 뜻하는 ‘D’를 남겨 두고 있다. 삼성디스플레이 출범 당시 받은 그 회사 지분 15%도 아직 보유하고 있다. 회사의 출발점을 잊지 말자는 뜻일 수도 있고 ‘우리가 삼성의 디스플레이 원조’라는 자부심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삼성SDI는 1년 이상 영업손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삼성SDI는 최근 삼성디스플레이 지분을 매각, 약 10조 원 이상의 자금을 확보하여 2차전지 사업에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늦은 감이 있지만 환영할 일이다. 삼성SDI가 고전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경쟁사보다 투자가 늦어졌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 쉽지 않았을 결정은 과거의 영광과 헤어질 결심이며 새로운 사업으로 승부를 보기 위한 기초 체력을 보강하겠다는 살아남을 결심이다.
기업의 역사에는 이런 결단들이 가득하다. 목재 회사에서 통신 기업으로 변신한 노키아, 광산 회 사에서 화학 소재기업이 된 3M도 이런 변신으로 살아남은 회사이다. 코닥필름과 코카콜라로 내 수 시장에서 승승장구하던 두산도 소비재 사업을 과감히 정리하면서 중공업, 원전 기업으로 성장 동력을 마련할 수 있었다. 대만의 디스플레이 기업 AUO와 이노룩스는 이미 반도체 패키징 사업 에 진출했고 인공지능(AI) 서버용 공동 패키지 광학(CPO) 기술 개발에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사업 다각화가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존 사업의 한계를 돌파한 기업들은 대개 크고 작은 변신 시도의 경험을 소중한 자산으로 간직하고 있다.
삼성SDI도 미루어 두었던 숙제들을 하나씩 꺼내들고 답을 준비해야 한다. 미래사업을 이끌어갈 차세대 기술 개발의 성과와 지금의 사업에서 성공할 수 있는 실력을 빠르고 균형 있게 쌓아간다면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필요한 경우 과거의 결정을 뒤집는 불편 한 선택도 과감하게 해줄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 그렇게 새로운 본업에서 입지를 다진다면 자신 있게 'D'를 다른 글자로 바꿀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2차전지 기업들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임성균 배터리다이브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