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의 불안한 미래, '지능 대체'
혁신의 중심이 된 소프트웨어
국가운영체제 다시 설계해야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2월 27일 서울 성동구 소재 인공지능(AI) 혁신기업 뉴로메카를 방문해 AI 혁신기업들의 제품을 체험하고 있다. 뉴스1
최근 미국의 한 투자사가 공개한 인공지능(AI) 보고서가 시장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형식은 소설에 가깝지만, 내용은 불편할 만큼 현실적이다. 보고서는 2028년을 배경으로, AI가 화이트칼라 직업의 상당 부분을 대체한 사회를 그린다. 기업의 생산성은 급격히 높아지지만, 사람들의 소득은 줄어들고 소비는 위축된다. 기업은 비용 절감을 위해 더 많은 AI를 도입하고, 그 결과 더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는다. 자본과 설비를 보유한 소수 기업만이 이익을 가져가는 구조다. 생산성의 상승이 성장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수요 붕괴로 귀결되는 ‘지능 대체의 역설’이다.
이 시나리오가 주목받는 이유는 기술 자체 때문이 아니다. 문제는 기술을 받아들이는 사회의 구조다. 생산 시스템은 빠르게 진화하고 있지만, 이를 떠받치는 제도와 시장의 작동 방식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과거 산업혁명에서도 기술은 일자리를 대체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산업과 소비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생산성 증가가 새로운 수요로 연결될 수 있는 구조가 제대로 작동할지에 대한 의문이 커지고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혁신을 ‘하드웨어’의 문제로 이해해 왔다. 도로를 건설하고, 공장을 세우고, 산업단지를 조성하는 것이 성장의 핵심이었다. 한국은 이 방식으로 조선, 자동차, 반도체 산업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했다. 그러나 인공지능과 데이터가 중심이 되는 시대에는 경쟁력의 기준이 달라진다. 이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지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 소프트웨어이다.
여기서 말하는 ‘소프트웨어’는 정보기술(IT)을 의미하지 않는다. 규제와 제도, 데이터의 흐름, 인재의 이동, 산업 간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운영 방식 전체를 뜻한다. 기술이 등장했을 때 그것을 얼마나 빠르게 실험할 수 있는지, 실패를 어떻게 흡수하는지, 산업 간 연결이 얼마나 자유로운지에 따라 혁신의 속도는 결정된다.
이 기준에서 보면 한국의 한계는 분명하다. 우리는 여전히 새로운 산업을 만들기 위해 단지를 조성하고 센터를 건립한다. 그러나 그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제한적이다. 자율주행 기술은 세계적 수준에 근접했지만, 도심에서 자유롭게 운행되는 서비스는 찾아보기 어렵다. 드론 배송 역시 기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규제와 인허가에 가로막혀 실증 수준에 머물러 있다. 데이터는 축적되고 있지만 산업 간 활용은 제한적이고, 새로운 서비스는 규제 해석에 따라 시작조차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운영체제의 문제다. 소프트웨어는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되며 진화해야 한다. 스마트폰 운영체제가 환경 변화에 맞춰 빠르게 개선되듯, 국가의 제도와 규제도 기술 변화에 맞춰 유연하게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시스템은 여전히 안정성을 이유로 변화 속도가 느리다. AI 시대에 맞는 운영체제가 준비되어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AI 확산이 본격화되면 앞선 시나리오는 현실이 될 가능성이 있다. 기업은 비용 절감을 위해 AI를 도입하고, 특히 화이트칼라 영역에서의 변화는 빠르게 나타날 것이다. 문제는 생산성 향상이 소비로 이어지지 않을 경우다. 줄어든 인건비가 새로운 시장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생산성 증가는 오히려 수요를 위축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다. 이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성과를 경제 전반으로 확산시키는 구조가 작동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다만 한국에는 다른 가능성이 있다. 제조업 비중이 높다는 점이다. 제조업은 물리적 공정과 데이터가 결합되는 영역으로, AI와 인간의 협력을 통해 생산성을 크게 끌어올릴 수 있는 구조를 갖고 있다. 특히 복잡하고, 어려운 비정형적인 공정에서는 숙련된 인간의 경험과 AI가 결합될 때 경쟁력이 극대화된다. AI를 단순한 인력 대체 수단이 아니라 생산 혁신 도구로 활용할 경우, 제조업은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다. 만약 이 기회를 제대로 활용한다면, 한국은 단순한 자동화를 넘어 ‘AI 기반 제조 혁신 국가’로 도약할 수 있다.
결국 핵심은 기술이 아니라 구조다. 생산성 혁신이 수요 확대로 이어지도록 만드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제도와 시장의 작동 방식이다. 과거 산업화가 공장을 짓는 일이었다면, 앞으로의 산업화는 국가 운영체제를 다시 설계하는 일이다. AI 시대의 경쟁력은 기술이 아니라, 그것을 작동시키는 시스템에서 결정된다.
차석원 서울대 공학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