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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T 사업 신청서를 처음 받아들었을 때, 나는 잠시 멍했다. 연간 창작활동 사례비 900만 원. 전업 예술인을 지원하겠다는 취지로 새로 만들어진 사업이었다. 나는 12년 차 시인이다. 이 정도면 서류 정도는 별 무리 없이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닫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일단 지난 1년간 내가 한 일을 건별로 기억해서 적어야 했다. 강연 한 번, 원고 한 편, 낭독 한 자리. 그게 언제였는지, 어디서였는지, 얼마를 받았는지. 어느 업장에서 세금을 어떻게 뗐는지까지. 나는 프리랜서 시인이다. 일이 들어오면 하고, 계약서를 쓰기도 하고 안 쓰기도 하고, 입금이 되면 확인하고 넘어간다. 그게 12년이다. 그걸 건별로 소환해서 정확하게 적으라는 것이다.
어제 하루 일과를 쓰라는 항목도 있었다. 전업이니까 매일이 다르다. 원고가 잡히면 종일 쓰고, 안 잡히면 걸어다니거나 멍하니 앉아 있다. 그게 시인의 하루다. 정신과 약을 복용하고 있는지, 자살에 대한 생각이 드는지도 물었다. 묻는 의도를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게 지원 자격을 가르는 서류 안에 있다면, 나는 이걸 복지 차원의 질문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솔직하게 적으면 불이익이 생기는 건 아닐까. 틀리게 기입하면 어떡하지. 그 공포가 드는 순간, 이 설문이 나를 돕기 위한 것인지 심사하기 위한 것인지 경계가 흐려진다. 가난을 증명하면서, 정신까지 검열받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900만 원을 받기 위해, 내 가난의 역사를 단 하나의 오류도 없이 재구성해야 했다.
작년에 나는 적지 않은 돈을 벌었다. 하지만 그건 몇 년 치 작업을 담보로 받은 선인세였다. 계약 하나가 잡혔다고 그해가 풍요로운 게 아니다. 그 돈은 앞으로 몇 년을 미리 판 대가다. 그런데 제도는 그걸 그해 으로 잡는다. 가난을 증명하라면서, 가난의 구조는 읽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최근에 다른 기금을 받은 적 있다면 이 사업 자체를 신청할 수 없다. 그러니까 이 제도가 그리는 지원 대상은 이런 사람이다. 가난하되 가난을 완벽하게 증명할 수 있어야 하고, 오래 활동했으되 최근엔 아무 지원도 못 받았어야 하고, 선인세 같은 목돈은 없어야 하고, 예술인 자격증도 미리 갖춰놨어야 한다. 이 조건을 동시에 충족하는 예술가가 과연 얼마나 될까.
더 근본적인 문제는 신청 자격 자체였다. K-ART 사업을 신청하려면 예술인 활동증명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예술인 활동증명이라는 것이, 이미 활동 이력이 있는 사람에게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다. 공연 횟수, 전시 이력, 출판 기록, 그런 것들이 있어야 증명이 된다. 그러니 이제 막 시작하는 작가들, 제도 바깥의 장르를 택한 예술가들, 주류 경로를 밟지 않은 사람들은 이 첫 번째 관문에서부터 막힌다. 예술인 자격을 얻지 못한 사람들, 그러니까 현장에서는 분명히 예술을 하고 있지만 서류상으로는 무면허인 예술가들이 속출하고 있다.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기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청조차 못 한 채 소식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 옆에서 보면서도 나는 이해가 안 됐다.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작가들도 몇 번의 재도전 끝에 예술인 증명을 해냈다는 것을 보고, 당황스러웠다. 이 기준은 대체 누가, 어떤 논의를 거쳐 만든 것인가. 그 과정은 매우 불투명하다.
앞으로 2년간 어떻게 창작할 것인지도 써야 했다. 계획서다. 미래를 적으라는 것이다. 나는 그나마 쌓인 계약서가 있어서 지나온 흔적을 붙잡고 미래를 유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신진 작가들은? 이제 막 시작한 사람, 아직 계약서 한 장 없는 사람, 그러나 분명히 쓰고 있고 만들고 있는 사람들은 이 미래를 무엇으로 증명하란 말인가. 경력이 없으면 미래도 없다는 식의 구조다. 지원이 필요한 사람일수록 지원받기 어려운 아이러니라니.
그리고 또 다른 소식이 들렸다. 인공지능(AI)으로 출판하거나 작곡한 작품을 제출한 사람들이 예술인 활동증명을 통과한 사례가 발견됐다는 것이다. 논란이 됐다. 나는 이 논란 앞에서 AI 자체를 탓하고 싶지 않다. AI는 도구다. 현대미술이 이미 AI와 협업하고 있고, 나는 아주 미래에는 도구로써 AI를 잘 다루고 방향을 잡는 사람이 새로운 창조를 하는 시대가 결국은 어쩔 수 없이 오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오판이고, 시기상조다. 예술인 자격이란 결과물 한 장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그 사람의 작업이 어떻게 쌓여왔는지를 봐야 한다. 얼마나 오래, 얼마나 많이 실패하면서, 어떤 방식으로 자기 언어를 만들어왔는지. 그 시간을 봐야 한다. 그게 예술가를 증명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제도는 그걸 보지 않는다. 아니, 그걸 볼 수 있는 심사 구조가 애초에 갖춰져 있지 않다.
900만 원이다. 솔직히 말하자. 적다. 서울에서 전업 작가로 1년을 살기엔 턱없이 모자라다. 그럼에도 이 돈이 간절한 사람들이 있다는 건, 그만큼 이 바닥이 가난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나라는 그 적은 돈을 주면서 우리에게 전업을 요구하고, 가난을 증명하라고 한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을 증명하는 데 쏟아야 하는 시간과 에너지를 생각해본 적 있는가. 그리고 그 증명조차 완벽하게 해내지 못하면 자격을 박탈당할 수 있다는 공포를. 그 공포 속에서 서류를 만지작거리다 포기하는 사람들을.
나는 12년을 썼다. 그 시간이 서류 한 장에 다 담기지 않는다는 걸 안다. 담겨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12년이 있었기에 나는 그나마 이 난관을 헤쳐왔다. 이제 막 첫해를 보내고 있는 누군가는, 지금 이 문 앞에서 멈춰 서 있다.
AI가 통과되는 자리에서. 나라가 생각하는 예술의 중심은 대체 무엇일까.
이소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