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상]
마커스 레디커 '만국의 악당'
미국 역사화가 장 레옹 제롬 페리스의 '해적 검은 수염의 최후(The Capture of the Pirate, Blackbeard)'. 18세기 초 카리브해 일대에서 '검은 수염'으로 악명을 떨치던 잉글랜드 출신 해적 에드워드 티치가 1718년 북미 대서양 연안에서 영국 해군과 격전을 벌이다 최후를 맞는 순간을 묘사한 1920년대 작품이다. 위키미디어
만화 ‘원피스’에서 해적은 약탈자가 아니라 자유를 선택한 존재다. 주인공들이 추구하는 건 부가 아니라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다. 세계 정부와 권력 질서는 정의가 아니라 의심의 대상이다. 독자들이 감정을 이입하는 건 모험이 아니라 탈주다.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서도 관객들의 시선은 질서를 상징하는 제국 해군과 기업 권력 대신 규칙을 비틀며 살아가는 해적에게로 향한다.
우리 사회는 비교적 ‘안정된’ 제도 속에서 운용되고 있지만, 치열한 경쟁과 고착화된 계층 이동 구조, 심화되는 자산 격차, 노동 불안 등은 피할 수 없는 상수다.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이 우리 사회에 ‘정상 경로’라는 선택지가 있는지 묻는다. 제도는 유지되지만 희망은 고르게 분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해적 서사에 대한 열광과 맥이 닿는다. 체제에 대한 저항과 현실 전복에 대한 상상력의 발화다.
다만 루피(원피스)와 잭 스패로(캐리비안의 해적)에만 집중하면 해적 서사는 또 다른 신화로 물신화하고 ‘방구석 저항’에 그칠 수밖에 없다. 미국 피츠버그대 대서양사 석좌교수인 마커스 레디커의 ‘만국의 악당’이 반가운 이유다. 그는 학문적 영역에서 해적 서사를 집대성하는 내내 통상적인 기록의 영역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민중의 삶에 천착했다. 이번에도 대서양 해적의 황금시대로 통하는 1716~1726년 당시 해적의 신화와 현실을 ‘아래로부터의 역사’로 기록했다.
저자는 당시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해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새로운 질서·규칙에 대한 실험에 주목했다. 대항해 시대의 제국들이 거대한 부를 창출하는 과정에서 많은 선원과 병사와 노동자와 노예들은 임금 체불과 굶주림과 폭력을 피해 육지 대신 바다를 택했다. 선장은 선원투표로 선출했고, 전리품은 거의 공평하게 분배했고, 부상자에 대한 부조 시스템도 마련했다. 해적은 신분과 계급과 피부색이 다른 이들이 기존 질서의 바깥에서 새로운 연대와 규칙을 만들어내며 제국과 상업자본과 노예무역에 맞서 집단화한 결과물이었다. 당시 지배권력이 해적을 ‘인류의 적’으로 규정한 건 체제 수호를 위한 ‘정치적’ 대응이었다.
저자의 접근법은 사회가 어떤 조건에서 구성원들을 법과 제도의 바깥으로 밀어내는지를 직시하게 한다. 국가와 시장이 보호하지 못하고 전쟁과 경제 변동 속에서 소외된 이들은 언제라도 바다로 떠밀릴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왜 법을 어기면서 다른 삶을 택할 수밖에 없는가. 누가 누구를 무슨 권리로 범죄자라고 부를 수 있나. ‘만국의 악당’은 체제의 정당성에 대한 불편한 거울을 품고 있다.
만국의 악당·마커스 레디커 지음·박지순 옮김·갈무리 발행·336쪽·2만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