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권력 탄생' 지켜보니
'개혁 드라이브' 전망 '구조 개혁' 절박감도
"권력 집중, 권위주의 심화 가능성도"
또 럼 베트남 서기장이 6일 하노이 국회의사당에서 의원석을 돌며 의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하노이=EPA 연합뉴스
“저기, 또 럼 서기장(68) 입장한다.” 6일 베트남 하노이 국회의사당 5층 외국 언론 방청석. 한 기자의 낮은 목소리에 웅성거리던 장내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50여 명의 외신 기자가 일제히 카메라를 꺼내 셔터를 눌렀고,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그 중심에 선 럼 서기장은 여유로운 미소로 장내를 돌며 의원들과 악수를 나눴다.
‘호찌민 국가주석 이후 베트남에서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진 지도자’.
외국 언론들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는 이유다. 이미 1월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권력서열 1위인 서기장직을 5년 연임하기로 확정 지은 상태. 이번 국회에서 ‘서열 2위’ 국가주석직까지 거머쥐며 명실상부한 1인 지배 체제의 완성을 예고했다.
또 럼 베트남 서기장이 7일 하노이 국회의사당에서 국가주석으로 선출된 후 연단에 올라 의원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하노이=EPA 연합뉴스
붉은 넥타이 매고 “임무 완수 맹세하겠다”
한국일보는 6일과 7일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국회 개원식과 럼 서기장의 국가주석 선출 장면을 지켜봤다. 사회주의 국가인 베트남이 국회를 외부에 공개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틀간 지켜본 베트남 정치권은 특유의 일사불란함이 돋보이는 분위기였다. 기저에는 ‘고도 경제성장을 유지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흘렀다.
이변은 없었다. 럼 서기장은 7일 실시된 의회 투표에서 ‘찬성 495표, 반대 0표’ 만장일치로 국가주석 겸임을 확정했다. 의사당 첫째 줄 중앙에서 투표를 지켜보던 그는 결과가 발표된 순간 일어나 의원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이어 공산당을 상징하는 붉은 넥타이 차림으로 연단에 올라
"당과 국가, 인민이 부여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분투할 것을 맹세한다”
고 선서했다.
럼 서기장은 향후 5년간 당·정부·군을 아우르는 1인자로서 베트남을 이끈다. 1986년 도이머이(개혁·개방) 이후 수십 년간 유지된 서기장·국가주석·총리·국회의장 간 집단지도체제는 막을 내리고,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과 유사한 '1인 지배 체제'가 본격화됐다. 시 주석은 2013년 서기장과 국가주석을 겸임한 이래, 13년째 중국을 통치하고 있다.
베트남 하노이 시내에서 한 작업자가 조경용 화분을 나르고 있다. 하노이=AFP 연합뉴스
"강한 의지와 결단력으로 목표 실현"
럼 서기장은 취임 일성부터 강력한 리더십을 예고했다. 그는 취임사에서 “2045년까지 베트남을 고소득 선진국이자 평화로운 사회주의 국가가 되게 하겠다”며
“강한 의지와 결단력으로 전략 목표를 실현하겠다”
고 했다. 이어 “전당·전민·전군과 함께 거센 파도와 풍랑을 헤치고 나아가 민족의 소망을 이룰 것”이라며 ‘국가 총동원’ 의지를 드러냈다.
‘경제 체질변화’ 필요성도 강조했다. 럼 서기장은 “과학기술, 혁신, 디지털 전환을 주요 동력으로 하는 새로운 성장 모델을 확립하겠다”며 “세계 경제의 흐름에 우리나라가 함께 흐르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저임금 하청공장’에서 벗어나 ‘고부가가치 산업국가’로 거듭나겠다는 포부다. 그는 6일 국회 개회식 연설에서도 ‘도이머이’(개혁)라는 단어를 10차례나 사용하며 변화의 절박감을 역설했다.
베트남에서는 럼 서기장을 ‘두렵지만, 추진력 있는 인물’로 본다. 공안부 장관 시절 ‘불타는 용광로’로 불린 강도 높은 부패 척결을 주도해 공무원 사회를 개혁했고, 서기장에 오른 뒤에는 부처·행정구역 통폐합을 통해 행정직원 14만8,000여 명을 감축했다. 원자력 발전소, 남북 고속철도 등 수십조 원 규모의 인프라 건설도 밀어붙이고 있다.
럼 서기장은 막강한 권력을 바탕으로 경제성장에 가속 페달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 이한우 단국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는 "럼 서기장의 국가주석 겸직으로 당·국가 일체화가 강화됐고, 성과 중심의 경제 성장 정책을 추진력 있게 집행할 것으로 보인다"며 "이를 위해 사회 통제를 강화할 수 있다"고 했다.
베트남 국회의사당 전경. 하노이=EPA 연합뉴스
관료주의 개선 전망... '성과 입증' 과제도
권력 핵심부에 ‘친정 체제’도 꾸렸다. 서열 3위인 신임 총리에 레 민 흥(56) 전 베트남 중앙은행 총재를 발탁했다. 46세에 '중앙은행 최연소 총재'에 오른 그는 금융 실무에 밝은 인물로, 럼 서기장의 멘토였던 레 민 흐엉 전 공안부 장관의 아들이다. 르엉 땀 꽝 공안부 장관(수사 총괄), 응우옌 주이 응옥 당 중앙조직부장(인사 총괄), 쩐시타인 당 중앙검사위원장(감찰 총괄)도 럼 서기장의 사람으로 분류된다.
의회에서 만난 외신 기자들은 럼 서기장의 광폭 행보를 예상했다. 한 미국 기자는 “베트남은 미중 갈등 속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라며 “베트남이 럼 서기장에 힘을 몰아줘 성장 동력을 찾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고 했다. 중국 및 일본 언론인들은 “럼 서기장이 주요국 정상들과 적극적인 대면 외교를 통해 국제사회에서 입지를 강화하려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럼 서기장은 오는 14일 중국을 방문해 시 주석과 만날 예정이다.
한국은 럼 서기장의 권한 강화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분위기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해 정부 출범 이후 럼 서기장을 첫 국빈 방문으로 초청하며 양국 관계에 공을 들였다. 재계 관계자는 “럼 서기장의 경제 발전 의지가 각 부처에 전달되면 의사결정에 시간이 걸리는 관료주의가 개선될 수 있다”고 기대했다.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40년 넘게 공안부에서 근무한 럼 서기장의 이력이 권위주의 강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시선도 있다. AP통신은 “이란 전쟁으로 세계경제가 혼란에 빠진 가운데 럼 서기장이 연 10% 경제 성장 비전을 현실로 구현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고 평가했다. 싱가포르 ISEAS 연구소의 응우옌 카크 장 연구원은 AP에 “베트남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신중한 균형 외교로 이득을 얻었지만, 세계가 더욱 격동적으로 변해가면서 그 입장을 유지하기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예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