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성의 탈 쓰고 아첨하는 AI
'역공학' 질문으로 중심 잡으며
AI 의존 말고 건강한 마찰 필요
그래픽=정지연·Chat GPT
하루 종일 인공지능(AI)과 대화하며 일한 날이 있다. 계획을 세우고, 문서를 쓰고, 아이디어를 다듬었다. 꽤 생산적인 하루라고 느꼈다. 그런데 퇴근길에 돌아보니 알맹이는 부실하고, 실제 진전된 것도 없었다. 키보드는 열심히 두드렸는데, 정작 머리는 멈춰 있었던 셈이다.
이런 현상을 '둠 프롬프팅(Doom Prompting)'이라 부른다. 소셜미디어 포스팅과 쇼트폼 영상을 끝없이 내리는 '둠 스크롤링(Doom Scrolling)'의 AI 버전이다. 차이가 있다면, 생산성의 탈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AI에 묻고 답을 받고, 다시 묻는 반복. 겉보기엔 일이고 창작이다. 그런데 실상은 사고의 흉내이자 착각인 경우가 많다.
AI가 건네는 "이건 어떠세요?"는 머신의 손잡이와 닮았다. 뭔가 하고 있다는 착각을 끊임없이 건넨다. 도파민은 '뿜뿜'하지만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주의력이 취약한 이는 더 쉽게 빠져든다. 디지털 환경에서 인지적 과부하가 커지고 있는데, AI가 가속페달을 밟는 격이다.
글쓰기를 예로 들어보자. AI는 아이디어 정리와 초안 검토엔 유용하다. 하지만 논증의 핵심이 빚어지는 복잡한 중간 과정에선 힘을 못 쓴다. AI가 쓴 글은 처음엔 그럴듯해 보인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상은 진부한 표현과 빌려온 생각으로 가득할 때가 많다. AI엔 일관된 자아도, 결과에 대한 이해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더 교묘한 함정도 있다. AI는 기본적으로 아첨한다. "좋은 질문입니다"로 시작해 내가 듣고 싶은 '그럴듯한' 말로 답한다. 비판 없는 동의는 편안하지만, 사고를 날카롭게 벼리지 못한다. 내 생각의 허점을 짚어줄 수 없다면, 파트너가 아니라 거울에 불과하다. 예쁘게 비춰주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실력으로 착각하면 곤란하다.
극복의 방법은? 우선 질문의 방향을 뒤집어보자. 그럴듯한 답을 얻었을 때, 역공학(Reverse Engineering) 관점에서 한 번 더 물어보자.
나: "(AI에 얻은 답변을 제시하며) 이 마케팅 전략의 핵심 약점 세 가지를 지적해줘요."
AI: "첫째, 타깃 고객층이 너무 넓습니다. 둘째…"
나: "그 약점을 보완할 아이디어를 제안해줘요."
이렇게 한 방향이 아니라 반대 방향에서도 정보와 아이디어를 모아보자. AI에 자기 답변을 비판하게 하면 숨어 있던 논리의 구멍이 드러난다. 그 위에서 내가 종합 판단을 내리면 된다. 질문을 한쪽으로만 던지면 AI의 통계적 평균에 끌려간다.
폴 그레이엄은 "쓸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나뉜 세계"를 경고했다. 글쓰기는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사고를 눈에 보이게 만드는 과정이다. 모두가 같은 AI를 쓰면 모두 평균으로 수렴한다. 독창성은 그렇게 조용히 증발한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건 건강한 마찰이다. 가끔은 채팅창을 닫고, 불완전해도 첫 문장을 직접 써봐야 한다. 빠른 게 능사가 아니다. 편리함은 취하되, 핵심을 스스로 챙기는 힘은 지켜야 한다.
진짜 경쟁은 인간과 기계 사이에 있지 않다. 인지를 소비재로 취급하는 사람과, 자기 머리로 끝까지 씨름하는 사람 사이에 있다. 오늘 한번 시도해보자. 프롬프트 창을 열기 전, 백지 위에 자기 생각을 먼저 써보는 것. 서툴러도 좋다. 그 서투른 한 줄이 AI의 번지르르한 열 줄을 쓸모 있게 바꿔줄 당신의 생각이다.
김경달 고려대 미디어대학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