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늬 미국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트럼프 "주한미군이 한국 방어" 숫자 부풀리며 또 파병 압박
'에너지 안보-군사 안보' 고차방정식…靑 "신중한 검토 필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호르무즈해협 위기를 계기로 주요 동맹국들을 향해 사실상의 '안보 청구서'를 들이밀었다. 특히 한국을 직접 지목하며 주한미군 주둔까지 거론한 것은 동맹을 협력 관계가 아닌 '대가를 요구하는 거래'로 보는 인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장면으로 평가된다. 여기에 "누가 돕는지 기억하겠다"는 경고성 발언까지 더해지며 압박 수위는 한층 높아졌다.
그럼에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동맹국들이 외면하는 등 압박이 통하지 않자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매우 어리석은 실수"라고 비판하며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급기야 "더 이상 도움은 필요 없다"고 신경질적인 태도도 보였다. 압박을 극대화한 뒤 곧바로 거리를 두는 전형적인 트럼프식 '강온 전략'이 반복된 셈이다.
외신들은 이러한 흐름을 단순한 변덕이 아닌 계산된 행보로 해석하고 있다. 미국이 주도한 대(對)이란 전쟁에 동맹들이 어디까지 동참할지를 가늠하는 '리트머스시험지'라는 것이다. 겉으로는 "우리는 혼자서도 할 수 있다"고 선을 긋지만, 실제로는 참여 여부를 통해 동맹의 충성도와 부담 분담 의지를 저울질하려는 전략적 압박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한국은 '에너지 수급'과 '군사 안보'가 동시에 얽힌 구조 속에서 선택의 여지가 가장 제한된, 이번 사안의 핵심 시험대에 서있는 국가로 지목된다.
3월16일 서울 종로구 주한 미국대사관 앞에서 열린 ‘미국의 호르무즈해협 파병 요구 규탄 및 파병 반대 긴급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 원유 수입 60%가 호르무즈해협 통과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한국과 일본, 유럽 국가들을 상대로 호르무즈해협 보호를 위한 군함 파견을 요구하며 "우리는 수십 년간 이들을 보호해 왔다"며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냈다. 특히 한국에 대해 "4만5000명의 병력을 두고 있다"고 언급하며 실제(약 2만8500명)보다 부풀린 수치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미국이 제공해온 안보를 근거로 동맹의 군사적 기여를 요구하는 '안보 무임승차론'의 전형적인 재등장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번 사안의 본질은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안보 인식이 그대로 드러난 데 있다. 그는 동맹을 가치 기반의 협력 관계라기보다 비용과 보상이 교환되는 거래 관계로 인식해 왔다. 과거 나토 방위비 분담금 논쟁이나 주한미군 주둔 비용 문제에서도 같은 접근법을 취했다. 역시나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동에서 미국이 주도한 군사작전에 동맹이 참여하지 않자, 곧바로 "우리가 보호해 줬으니 이제는 도와야 한다"는 논리를 꺼내든 것이다.
외신들은 이번 상황에 대해 직설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프랑스 르몽드는 트럼프 대통령이 동맹국 참여를 '충성심 시험'으로 바꿔놓았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 자신도 "그들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기 위해 요청하는 것"이라고 말해 이러한 해석에 힘을 실었다. 이는 군사적 필요보다 정치적 메시지가 더 강한 요청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맹국들의 반응은 대체로 냉담하다. 유럽 국가들은 "이 전쟁은 우리의 전쟁이 아니다"며 선을 긋고 있으며, 독일과 이탈리아는 참여를 명확히 거부했다. 프랑스도 방어적 임무 외에는 개입을 배제했고, 영국도 나토 차원의 개입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며 거리를 두고 있다. 일본 역시 "군함 파견 기준이 매우 높다"며 신중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다카이치 총리가 호위함 파견을 요청받은 나라의 정상 중 처음으로 트럼프 대통령과 대면한다는 점은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반응은 구조적으로 예견된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유럽연합(EU) 외교 정책 수장인 카야 칼라스는 "이것은 유럽의 전쟁이 아니다. 우리가 시작한 것도 아니고, 사전 협의도 없었다"고 밝혀 군사행동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독일 국방장관 보리스 피스토리우스 역시 "강력한 미 해군이 이미 있는 상황에서 유럽 함정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이는 호르무즈해협이 단순한 해상 보호 임무가 아니라 실제 전쟁 위험이 상존하는 지역이라는 점을 반영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정부, 판단 유보하며 '전략적 모호성' 유지
이런 가운데 한국은 가장 어려운 선택에 직면해 있다. 한국은 원유의 약 70%, 액화천연가스(LNG)의 약 20%를 중동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상당 물량이 호르무즈해협을 통과한다. 한국 에너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24년 기준 호르무즈해협 통과 원유에 대한 의존도는 한국 62%, 일본 69%, 중국 49% 수준이다. 즉, 봉쇄가 장기화할 경우 곧바로 에너지 수급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동시에 한국은 미국과의 안보동맹에 깊이 의존하고 있다.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하는 데 주한미군의 억지력은 핵심축이다. 그러나 이란과의 관계, 중동에 진출한 한국 기업과 교민의 안전 문제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점에서 선택은 단순하지 않다. 특히 이번 사안은 전쟁 상황이라는 점에서 국회 동의 등 헌법적·법적 절차가 필수적이라는 점도 부담 요인이다.
정부는 신중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청와대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밝혔고, 국방부 역시 미국으로부터 공식 요청이 없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외교부도 명확한 입장을 유보하며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는 모습이다. 다만 이번 사안이 한미 관계 전반으로 확산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군 주둔을 직접 거론한 것은 동맹의 군사적 기여를 다른 안보 현안과 연계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트럼프 대통령이 동맹국들의 협조 여부를 나토의 미래와 연결 지으며 압박한 점을 들어, 동맹을 '거래적 관계'로 바라보는 접근법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런 가운데 한국의 최종 판단은 3월19일(현지시간) 미국에서 열리는 미·일 정상회담이 분기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온다. 일본 역시 동일한 파병 요구를 받고 있는 만큼,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어떤 입장을 내놓느냐에 따라 한국의 선택지와 부담도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일본이 협조 의사를 밝힐 경우 한·미·일 공조 틀을 고려해야 하는 한국에 대한 압박은 커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일본이 신중론을 유지할 경우 한국 역시 대응 여지를 확보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당장 결론을 내리기보다 국회 동의 절차와 준비 기간 등을 지렛대 삼아 협상 시간을 확보하는 전략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