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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봉투 사재기 현상이 보여주는 '불안의 기억' [남인숙의 신중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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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숙 작가 sisa@sisajournal.com]

석유 공급 위기에서 시작된 '일상 붕괴' 공포, 종량제 봉투로 몰려

IMF·저축은행·부동산까지…반복된 배신이 만든 중년의 생존 본능

필자는 지난주 동생과 일상적인 대화를 하다 믿기 어려운 말을 들었다. 종량제 쓰레기봉투가 떨어져 사러 갔는데, 근처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더라는 것이다. 할 수 없이 마트에서 물건을 사고 담아가는 20리터짜리 종량제 봉투만 하나 받았다고 했다. 살면서 쓰레기 버릴 봉투를 사기 위해 잡화를 사는 장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또래 중년들 사이에 끼어있을 때 일찌감치 "쓰레기봉투를 미리 사놓으면 좋다"는 말을 생활 팁 정도로 듣고 잊었던 기억이 뒤늦게 떠올랐다.

이란발 전쟁이 중동의 석유 공급망을 흔들기 시작하자 석유에서 뽑아내는 원료인 나프타 공급에도 차질이 생겼다. 쓰레기봉투를 만드는 플라스틱의 재료는 나프타이고, 석유 공급 문제가 계속된다면 쓰레기봉투 생산에도 문제가 생기는 건 맞다. 하지만 필자의 의문은 '왜 하필 쓰레기봉투인가?'였다. 나프타는 석유화학의 핵심 원료라서 현대사회를 구성하는 온갖 것을 만드는 재료가 된다. 플라스틱과 비닐 재질인 모든 것, 섬유, 우리가 잘 모르지만 필수적인 기초 화학물질 상당수가 여기서 나온다. 그중 왜 하필 쓰레기봉투를 사재기해 품귀 현상을 일으키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집 창고에 왜 종량제 봉투가 제법 있는지 복기하면서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

중동 상황에 따른 나프타 수급 문제로 종량제 봉투 생산이 차질을 빚고 있다. 사진은 3월24일 서울 시내 한 마트에서 판매 중인 쓰레기봉투 ⓒ연합뉴스

공급 부족보다 빨리 번지는 불안과 사재기

평소에도 종량제 봉투는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필수 공공재인 종량제 봉투는 가격이 엄격하게 통제되기 때문에 이것을 파는 마트나 편의점 입장에서는 그리 팔고 싶은 물건이 아니다. 심지어 구매자가 신용카드로 결제하면 마진보다 수수료가 더 커져 팔수록 손해가 나기도 한다. 종량제 봉투 판매는 그것을 구하러 나온 고객들을 라면 한 묶음이라도 더 사가게 유인하는 미끼 상품이거나 순정한 고객 서비스인 셈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종량제 봉투는 마음먹고 멀리 사러 나가야 하는 물건, 가까운 판매처에 재고가 있을 때를 놓치지 않고 넉넉하게 사두어야 하는 물건이 되었다. 필자가 두 달 전에 집 근처 편의점에서 재고가 있다는 말에 '주실 수 있는 만큼 다 주세요'라고 말하며 현금을 내밀었던 이유도 이것이었다. 그래도 10리터 봉지 한 묶음을 산 것이 고작이었다.

이런 구조는 소수의 사람들이 원래도 구하기 힘든 종량제 봉투를 사재기하면서 쉽게 '쓰레기봉투 대란'으로 연결되었다. 내일 당장 쓰레기를 담아 버릴 종량제 봉투를 사지 못한 사람들의 경험담이 공유되면서 별생각 없던 사람들도 이 불안 매집의 행렬에 동참했다. 지자체와 정부 부처에서 나서서 재고가 충분하다고 알리고 적극적으로 유통을 조절하면서 가라앉는 모양새다.

생각해 보면 끝내 이런 방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종량제 봉투를 구하지 못해 쓰레기를 집 안에 쌓아두거나, 거리가 쓰레기를 버리고 도주하는 등의 범죄로 무법지대가 되기 전에 어떤 방법이든 내놓을 정도의 정돈된 사회 아니던가. 이를테면 일부 지자체에서 이미 하고 있는 것처럼 한시적으로 일반 봉투에 쓰레기를 넣어 버리는 것을 허용하는 것 같은, 생각보다 간단하고 당연한 대책 말이다.

한편 청년 세대는 한 걸음 떨어져 이 일을 관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대 후반인 필자의 자녀도 이 문제에 대해 잘 알기는 하지만 실생활에서는 무관심했고, 이후 만나거나 소통한 20·30대 청년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부모와 동거하는 이들은 부모가 이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하고, 홀로 독립 세대를 이룬 이들은 마음만 먹으면 구할 수 있는 한두 장 정도의 종량제 봉투에도 만족할 수 있다. 대신 이들은 쓰레기봉투 사태를 온라인에서 밈으로 소비한다.

사재기한 종량제 봉투를 사진으로 인증해 일부러 관심을 모으거나, 반대로 사재기하는 사람들을 조롱하거나, 혹은 이 모든 현상을 재치 있는 표현으로 스케치한다. 문제를 시스템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이 더 강하고 합리성에 천착하는 현재의 청년 세대에게 이 일부 기성세대의 움직임은 이기적이고 불합리해 보인다. 상식적인 사람들이 이 시선에 의견을 기울이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집단 기억이 만든 한국형 위기 대응 방식

그럼에도 필자는 이번 사태가 온라인상에서 마냥 밈으로 조롱당할 일만은 아니라고 여긴다. 호르무즈해협 봉쇄로 석유 공급 문제가 가시화하면서 경제 문제는 누구에게든 가장 큰 관심사가 되었다. 산유국이 아니면서도 세계적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정유 수출국에, 해외 의존도가 높은 경제구조를 가진 나라에 살다 보니 남녀노소가 이란 전쟁 상황 정도는 훤히 꿰고 있다. 하지만 직접 가계를 지탱하는 중년의 불안에는 책임감이 더해진다. 범정부적인 대책이 나올 것은 알고 있지만 그렇게 되기 전에 얼마간이라도 일상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유가 폭등으로 다니던 회사가 도산해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지만 그건 개인이 어쩌지 못하는 일이다. 하지만 당장 내 집이 더럽혀지지 않게 쓰레기봉투를 살 수는 있다. 예측할 수 없는 거대한 변수가 도사리고 있는 시기에는 좀 더 큰 책임을 떠안은 이들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뭐라도 찾아서 한다. 게다가 이들은 권위 있는 이들이 대중을 안심시키려 하는 말을 그대로 믿었다가 어떤 낭패를 보게 되는지 오랜 시간 목격해 왔다. 1990년대 외환위기가 터지기 직전까지 정부와 언론은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은 튼튼하다" "외환보유고에 문제가 없다"며 국민을 안심시켰다. 2011년 저축은행 사태 때는 금융 당국과 은행 측이 영업정지 직전까지도 "예금자 보호가 되니 안심하고 돈을 빼지 말라"고 발표했지만, 그 발표를 한 VIP와 관계자들은 몰래 수백억원의 예금을 사전 인출해 갔다.

그동안 진보·보수 집권 여부와 무관하게 정부는 "부동산 가격은 안정될 것이니 무리해서 집 사지 말라"는 시그널을 수십 번 보냈지만, 그 말을 그대로 믿은 이들은 자고 일어나면 집값이 오르는 현실에서 '벼락거지'가 된 심정을 느껴야만 했다. 팬데믹 시기에는 500원짜리 방역 마스크가 5000원이 되는 걸 보면서 위기가 다가오면 손에 쥘 수 있는 것이라면 일단 붙잡고 봐야 한다는 걸 학습했다. 이 세대가 겪은 상처의 궤적이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이 쓰레기봉투 이슈에 숨은 맥락일 수 있는 것이다.

집단적 트라우마를 넘어 시스템을 신뢰하는 사회로 진화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름마저 민망한 이 쓰레기봉투 사재기 사태가 던지는 뼈아픈 질문이다.

남인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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