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훈 시사저널e 기자 komh123@sisajournal-e.com]
데이터센터 냉각 공조부터 차세대 휴머노이드 로봇까지
글로벌 빅테크와 손잡고 수십조 B2B 시장 선점 각축전
50년 넘게 우리 집 거실과 주방을 책임져온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새로운 시험대에 올랐다. '가성비'를 앞세운 중국 가전업체들의 공세가 매서운 데다,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가전 시장 자체가 더 이상 예전처럼 쑥쑥 크지 않기 때문이다.
돌파구를 찾기 위해 두 회사가 눈을 돌린 곳은 바로 기업 고객을 상대하는 'B2B(기업 간 거래)' 시장이다. 그동안 일반 소비자에게 에어컨, TV 등을 팔며 쌓은 기술력을 기업용 시장에 쏟아붓겠다는 전략이다. 자연스럽게 두 가전 명가의 자존심 대결도 이제는 기업 시장으로 확장되고 있다. 실제로 두 회사 모두 전체 매출에서 기업 간 거래가 차지하는 비중이 쑥쑥 커지는 추세다.
LG전자는 지난해 대형 냉난방 시스템(HVAC)과 자동차 전장, 기업용 디스플레이(사이니지) 등을 합친 B2B 매출이 24조1000억원을 기록했다. 전체 매출의 35%를 넘는 든든한 효자 사업이 된 셈이다. 내친김에 2030년까지 이 비중을 40%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삼성전자 역시 스마트폰과 가전 등을 담당하는 DX 부문에서 B2B 매출을 꾸준히 늘리고 있다. 특히 대형 냉난방 솔루션 매출은 최근 5년 동안 매년 두 자릿수 성장을 이어가고 있으며, 기업용 디스플레이 시장에서는 무려 17년째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 앞으로도 기업 시장의 덩치를 계속 키우겠다는 게 삼성전자의 속내다.
서울의 한 대형마트 TV 매장 ⓒ연합뉴스
2025년 APEC 당시 최고경영자 서밋에서 만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왼쪽)과 구광모 LG그룹 회장 ⓒ연합뉴스
뜨거운 '데이터센터'를 식혀라
요즘 기업 시장에서 두 회사가 가장 치열하게 맞붙는 분야는 '건물용 냉난방 시스템'(HVAC)이다. 쉽게 말해 커다란 빌딩이나 공장에 들어가는 거대한 에어컨이자 공기청정기다. 삼성과 LG는 이 분야에서 세계 최고가 되겠다는 포부를 품고 있다. 이들이 가장 군침을 흘리는 곳은 단연 '데이터센터'다.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24시간 뜨겁게 돌아가는 전 세계 데이터센터를 차갑게 식혀주는 기술이 무엇보다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글로벌 IT 공룡들의 마음을 누가 먼저 사로잡느냐가 승패를 가를 핵심 열쇠다.
LG전자는 세계적인 IT 기업 마이크로소프트(MS)를 잠재 고객으로 점찍고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초대형 데이터센터 전용 거대 냉동기(칠러)와 냉각수 분배장치(CDU)를 공급하기 위해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특히 냉각수 분배장치는 뜨거워진 서버에 차가운 물을 한 치의 오차 없이 보내주는 핵심 장치다. LG전자는 MS뿐만 아니라 클라우드 세계 1위인 아마존웹서비스(AWS)와도 납품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주형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LG전자 HVAC는 MS향 퀄 테스트(품질 검증)를 받는 게 최우선 과제로 지목된다"며 "고객사 쪽에서 먼저 얘기해 주면 LG전자도 비로소 고객사 언급이 가능해질 테고, 이를 레퍼런스(참고 자료) 삼아 AI 데이터센터향 HVAC 추가 수주가 빠른 속도로 올라올 것"이라고 분석했다.
해외시장을 뚫기 위한 준비도 꼼꼼하다. LG전자는 지난해 6월 유럽의 난방 전문업체 '오소(OSO)'를 품에 안았고 북미와 유럽, 인도 등 세계 곳곳에 연구개발(R&D) 거점을 다지고 있다. 현지 맞춤형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교육센터를 늘리는 한편, 수리가 필요할 때 곧바로 출동할 수 있도록 서비스 전문 자회사의 해외 지사도 계속 넓혀가고 있다.
삼성전자 역시 2025년 5월 독일의 유명 공조 업체 '플랙트그룹(FläktGroup)'을 인수하며 맞불을 놨다. 1918년에 세워진 플랙트그룹은 유럽에서 손꼽히는 기술력을 자랑하며, 최근에는 데이터센터 냉각 기술로 영토를 넓히고 있는 알짜 기업이다.
삼성전자는 이들과 손잡고 데이터센터는 물론 대형 병원이나 주상복합 아파트를 통째로 관리하는 냉난방 시장까지 싹쓸이하겠다는 계획이다. 당장 올해 안에 국내에 전용 생산공장을 새로 짓고, 이를 발판 삼아 아시아와 인도, 미국 지역까지 현지 생산과 서비스를 대폭 늘리며 맹추격에 나서고 있다.
미래 먹거리 '로봇'의 뼈대·근육도
기업 시장의 또 다른 승부처는 바로 '로봇'이다. 특히 사람을 닮은 휴머노이드 로봇과 집안일을 돕는 홈 로봇 시장을 놓고 두 회사의 자존심을 건 한판 승부가 다가오고 있다. 가장 먼저 불이 붙은 곳은 로봇의 뼈와 근육 역할을 하는 핵심 부품, '액추에이터'다. 모터와 톱니바퀴, 센서 등이 정밀하게 합쳐진 이 부품은 로봇이 자연스럽게 팔다리를 움직이게 해준다.
로봇 부품 시장의 성장세는 무서울 정도다. 시장조사 업체 밸류에이츠리포트에 따르면, 이 부품 시장은 2024년 1억5000만 달러(약 2200억원)에서 2031년 98억6400만 달러(약 14조5000억원)로 매년 80% 가까이 쑥쑥 클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발맞춰 LG전자는 올해 안에 'LG 액추에이터 악시움(AXIUM)'이라는 자체 로봇 부품의 대량생산 준비를 마칠 계획이다. 이 튼튼한 관절 부품이 처음 들어갈 주인공은 조만간 정식으로 출시될 가정용 로봇 'LG 클로이드'다.
이주형 연구원은 "LG전자 로봇 사업은 내년 LG 클로이드 PoC부터 진행하고, LG전자 악시움 같은 경우에도 올해 양산 체계를 구축하고 좀 더 크게 확장해 보겠다는 구상으로 보인다"며 "다만 로봇은 부품을 제외하곤 현재로서는 크게 구체화된 게 없다"고 말했다.
로봇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삼성전자의 발걸음도 바쁘다. 2024년 말, 두 발로 걷는 로봇으로 유명한 '레인보우로보틱스'의 지분 35%를 사들여 아예 자회사로 품었다. 이와 함께 사내에 로봇 사업의 조타수 역할을 할 '미래로봇추진단'을 꾸리고, 카이스트 명예교수이자 로봇 권위자인 오준호 창업자에게 지휘봉을 맡겼다.
삼성전자는 로봇의 근육(액추에이터)은 물론, 로봇의 두뇌 역할을 하는 소프트웨어(미들웨어)까지 자체적으로 개발해 냈다. 이를 바탕으로 사람을 닮은 다양한 생김새의 로봇을 연구하고 있다. 우선은 험난한 산업 현장에 투입될 로봇부터 상용화할 계획이다. 무거운 짐을 번쩍 들어올리거나, 극한 환경에서도 유연하게 움직이는 기술에 집중하고 있다.
나아가 로봇의 전신을 매끄럽게 통제하기 위해 스스로 학습하며 움직임을 다듬는 최첨단 AI 제어 기술을 연구하며,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과도 머리를 맞대고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