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한 문명 전체가 소멸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Tonight a whole civilization will die, never to be brought back again.)”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 현지 시각 7일 오전 SNS ‘트루스소셜’에 올린 글을 읽고 경악했다. 실행된다면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가 될 수밖에 없는 계획을 지구에서 가장 힘 센 나라의 지도자가 공공연히 내뱉었다.
그는 전날 기자회견을 열고 “이란이 합의하지 않으면 이란의 모든 발전소와 교량을 파괴하겠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란 주요 도시의 시민들은 발전소와 다리에 나와 ‘인간 띠’를 만들며 시설을 방어하고 나섰다.
이란 주요 도시에서 시민들이 발전소와 다리로 나와 ‘인간 띠’를 만들고 시설을 지키고 있다. (출처: 주폴란드이란대사관 X(구 트위터) 계정)
한국 시각으로 8일 오전, 미국과 이란이 2주간 휴전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명분 없는 전쟁이 한 달 넘게 이어지며 2,000명이 넘는 이란인이 목숨을 잃었다. 이 중 170명은 미국이 이란 남부 미나브 지역 여자초등학교에 투하한 미사일 때문에 사망했다.
이란 전쟁과 중동 혼란 속에 묻혀버린 팔레스타인의 참상
지난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으로 시작된 새로운 전쟁에 세계 질서가 요동쳤다. 앞선 ‘이스라엘-가자 전쟁’이 낳았던 잔혹한 이미지들은 뉴스에서도 밀려나고, 머릿속에서도 희미해지려 했다. 새로운 폭격 피해 규모, 기름값과 주가 등락, 심지어 원유 수입 차질로 인한 쓰레기봉투 대란 소식 등 이란 관련 뉴스를 따라가기도 벅찼다.
그러던 지난 3월 말, 이스라엘군이 이란과 레바논에 폭격을 이어가던 와중에 이스라엘 의회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만 적용되는 사형 법안을 통과시켰다. 테러 혐의로 이스라엘 군사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경우, 교수형에 처한다는 게 골자다. 국제사회는 특정 민족에게만 적용되는 사형법은 있을 수 없는 인종 차별이고 인권침해라며 강하게 규탄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스라엘에서 마지막으로 사형된 사람은 홀로코스트 주범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1962년 교수형을 당했다. 80여 년 전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였던 유대인(이스라엘 민족)들이 ‘학살의 가해자’가 되는 비극을 인류는, 그리고 언론은 어떻게 기록해야 할까.
이런 고민이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던 무렵,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라샤, 란다, 마야, 사자…’ 지난 1년 동안 ‘사단법인 아디(ADI)’를 통해 뉴스타파와 협업해 온 팔레스타인 예비 언론인들이다. 아디는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에서 ‘스피크 업(Speak Up)’이라는 프로젝트로 팔레스타인 여성 저널리스트를 육성하는 한국 ‘토종’ 비영리단체다.
뉴스타파는 지난해부터 아디와 손잡고 ‘스피크 업’ 예비 언론인들이 기록한 팔레스타인 현장의 소식을 한국어로 번역해 뉴스타파 홈페이지와 유튜브에 출판했다. ‘팔레스타인 리포트’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총 9편의 기사를 연재했다.
‘벚꽃 필터’와 서안지구의 ‘체크포인트’
지난 4월 2일, 그동안 기사로만 접했던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의 기자들을 화상으로 만났다. 더 좋은 기사를 위해서, 그동안 보내온 기사에 피드백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협업 시작 약 1년 만에 처음 성사된 미팅이었다.
마침, 이날 서울의 거리는 벚꽃으로 가득했다. 비록 벚꽃 만개와는 무관한 화상(畫像)회의였지만, 나는 화상(花上) 회의인 양 설렜다. 기사 바이라인(기사를 쓴 기자의 이름을 쓰는 줄)에 적힌 텍스트로만 알던 이들의 얼굴을 마주하고 이름을 불러보게 됐기 때문이다.
한국 시각 오후 4시 20분.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나블루스시의 여성지원센터에 카메라가 켜졌다. 테이블에 빙 둘러앉은 그들의 얼굴 표정도 반가움으로 상기돼 보였다. 물론 ‘벚꽃 필터’가 과하게 덧씌워졌던 나의 시각적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낭만은 찰나였다. 오고 있던 참석자 중 한 명이 나블루스 센터로 연락을 해왔다.
“‘사자’는 지금 체크포인트가 닫혀서 못 오고 있어요. 차 안에서 대기 중이라고 합니다.”
아랍어 통역을 맡은 쉬린이 말했다. 나와 관련된 일정을 위해 특정 장소로 이동 중이던 사람이 체크포인트에서 발이 묶여버린 현실을 듣는 순간 분노와 걱정이 밀려왔다. 팔레스타인 체크포인트는 무장한 이스라엘 군인이 통제하는 곳이 아니던가. 점령된 땅 서안지구의 현실이 화상회의라는 가상의 공간을 넘어 서울에 있는 내게도 성큼 다가온 순간이었다.
서안지구 전체 면적은 경기도의 절반 정도다. 이 둘레를 712km에 달하는 콘크리트 장벽이 에워싸고 있다. 팔레스타인 영토를 점령한 이스라엘은 이러한 ‘분리 장벽’과 더불어 800곳이 넘는 체크포인트 또는 검문소를 통해 서안지구 사람들의 이동을 임의로 통제한다. 고정된 장소에 있는 상시 검문소뿐만 아니라 이동식 검문소도 여기에 포함된다.
사자(23)는 나블루스주 까발란이라는 동네에 사는데, 같은 주 안에서 겨우 19km 떨어진 나블루스시로 가기 위해 체크포인트를 지나야 했다. 그런데 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언제 게이트가 열릴지 불투명한 상황에서 사자를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녀가 체크포인트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일단 기사 피드백 회의를 시작했다.
지난 4월 2일 사단법인 아디가 팔레스타인 나블루스시에서 운영하는 여성지원센터에 ‘스피크 업’ 기자들이 모여 뉴스타파와의 화상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아디에 따르면 2026년 5월 기준, ‘스피크 업’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여성 기자는 총 12명이다.
평균 연령 23세, 팔레스타인 여성 기자들
‘스피크 업’과 협업을 시작할 당시 뉴스타파 편집회의는 현지에서 완성되어 온 기사를 추가 데스킹이나 편집 없이 그대로 출판하기로 결정했다. 완성도 면에서 아쉬운 부분도 있었지만, 현지 기자들의 편집권을 존중하자는 취지였다.
리뷰의 대상은 지난달 보도한 ‘이스라엘의 물 도둑질’ 기사였다. 이스라엘의 수자원 약탈로 생존의 위협을 겪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목소리를 담은 내용이다. 이 사안을 영상으로 보도한 라샤에게 물었다.
기자 :
여리고 지역 알 아우자 계곡에 이스라엘 정착민들이 펌프를 설치해서 (이스라엘 정착민 쪽으로 ) 물길을 바꾼 거잖아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내용인데요. 그렇다면 문제의 펌프를 직접 찍어서 보여주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라샤:
거기는 접근 제한 구역이라 가까이 갈 수가 없었어요. 너무 위험해요.
현장성을 더 살리면 좋겠다는 조언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위험한 현장을 발로 뛰었을 그녀의 노고에 미안함이 앞섰다. 접근 제한 구역이라 펌프를 직접 찍지 못했다는 라샤의 항변에 나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이들이 녹록지 않은 상황 속에서 ‘스피크 업’이라는 프로젝트에 임하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아디와의 협업이 결정된 이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얄팍한 고민이 있었다. ‘가자지구에서 학살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서안지구에서 생산되는 기사가 얼마나 한국 독자의 관심을 끌 수 있을까?’
2025년 4월 ‘스피크 업’ 기자들이 서안지구 제닌 난민 캠프에서 취재하고 있다. (왼쪽부터: 아헤드 파크르 알딘, 란다 알와네, 마야 타반자)
팔레스타인 영토는 가자지구와 서안지구라는 두 구역으로 나뉜다. 230만 명이 거주하던 가자지구는 2023년 10월 전쟁 발발 이후 지속된 이스라엘의 집중 폭격으로 영토 전체가 폐허로 변했다. 딱히 피할 곳도 없는 남북 10km, 동서 5~10km 남짓한 좁은 땅이다.
이곳에서의 전쟁으로 팔레스타인 사람 최소 72,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여전히 수천 명의 유해가 폭격 폐허 아래 깔려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희생자 가운데 여성과 어린이 등 민간인 비중이 80퍼센트가 넘는다. 이스라엘-가자 전쟁을 단순한 ‘전쟁’이 아닌 ‘학살’이라고 불러야 하는 이유다.
반면 약 330만 명의 팔레스타인 인구가 거주하고 있는 서안지구는 전쟁의 중심지는 아니다. 대신 ‘이스라엘 정착민’의 토지와 자원 약탈이라는, 상대적으로 조용한 폭력과 오래된 갈등이 공기처럼 존재하는 곳이다. 여기서 ‘이스라엘 정착민’이란 국제법상 팔레스타인 영토인 서안지구를 불법으로 점유하고 거주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말한다.
‘서안지구 발 뉴스가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주목받을 수 있을지’를 놓고 답 없는 고민을 하긴 했지만, 팔레스타인에서 기자가 되고 싶다는 평균연령 23세 여성들이 누구인지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2023년 10월 이래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으로 언론인 270명가량이 목숨을 잃었다. 국경없는기자회를 포함한 전 세계 언론인들은 이스라엘의 이러한 만행을 두고 진실을 음소거시키기 위한 ‘언론인 표적 살해’라고 규탄하는 글로벌 캠페인을 벌이기까지 했다.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서 일어나는 폭력의 강도가 다르기는 해도, 서안지구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이 ‘팔레스타인 기자’라는 말이 내포하는 위험성을 모를 리가 없었다.
‘서안지구 관련 뉴스가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주목받을 수 있을지’를 놓고 답 없는 고민을 하긴 했지만, 팔레스타인에서 기자가 되고 싶다는 평균연령 23세 여성들이 누구인지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국경없는기자회에 따르면 지난 2023년 10월 이래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으로 220명이 넘는 언론인이 목숨을 잃었다. 전 세계 언론인들은 이스라엘의 이러한 만행을 두고 진실을 음소거시키기 위한 ‘언론인 표적 살해’라고 규탄하는 캠페인을 벌이기까지 했다.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서 일어나는 폭력의 강도가 다르기는 해도, 서안지구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이 ‘팔레스타인 기자’라는 말이 내포하는 위험성을 모를 리가 없었다.
2025년 9월 1일, 뉴스타파는 국경없는기자회를 비롯한 전 세계 250여 개 언론과 동시에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언론인 '표적 살해'를 규탄하는 배너를 홈페이지에 내걸었다.
예상대로 ‘스피크 업’ 기자들은 겁이 없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취재 현장에 나갈 때마다 두려움과 씨름하고 있었다. 마야(22)는 이스라엘군의 공격과 강제수색 대상이 된 구급대원들을 밀착 취재했다. 앰뷸런스에 동승해 구급대원들이 처한 현실을 생생하게 카메라에 담았다. 마야에게 취재 고충을 물었다. 그는 “현장을 다니며 이스라엘 정착민들의 공격의 대상이 될까봐 무섭다”고 말했다. “이러한 폭력에 대한 공포가 취재를 위축시킨다”고도 했다.
마야의 말에 통역을 돕던 쉬린도 거들었다. “요즘은 길거리에서 이스라엘 정착민을 마주치기만 해도 공격당해요.”
2025년 10월, 란다 알와네가 서안지구 나블루스에서 앰뷸런스를 타고 팔레스타인 구급대원들과 동행하며 취재하고 있다
‘스피크 업’ 기자들이 말한 두려움은 막연한 공포가 아니다. 서안지구에서 일어나는 정착민 폭력은 매년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기준 UN 집계에 따르면 지난 2년 동안 서안지구에서 발생한 정착민 폭력은 약 3,000건에 달한다. 최근에는 이스라엘 정착민들이 외국인 평화 활동가까지 공격하고 있다. 불과 2주 전에는 서안지구에서 정착민 폭력을 취재하던 CNN 기자가 이스라엘군에 의해 (자동차 안에서 대기를 강요당하며) 억류된 일도 있었다.
두려움과 씨름하며 사수하는 ‘바이라인’
피드백 세션이 시작되고 1시간이 훌쩍 지났을 무렵, 마침내 사자의 얼굴이 화면에 떴다. 끝내 체크포인트를 통과하지 못한 사자는 집으로 돌아가서야 카메라를 켤 수 있었다. 나는 이러한 폭력과 통제의 일상을 어떻게 소화하고 소통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당사자인 사자는 정확히 이런 이유로 기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런 현실을 제대로 기록하고 싶어요. 특히 여성 기자가 더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여성도 당연히 중요한 사회 구성원인데요. 점령과 억압의 피해자 중에는 여성도 많습니다. 이 사회에서 (문화적 특성상) 여성에게 접근해 여성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데는 여성 기자가 더 유리해요.”
이동 중 이스라엘 체크포인트에 막혔던 사자 아자르(왼쪽 아래)가 집으로 돌아가 화상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그는 (이스라엘) 점령과 억압의 피해자 중에는 여성도 많다며 그들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는 기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스피크 업(Speak Up 더 크게 말하다)’이 ‘침묵’의 적극적 반대말이듯, ‘스피크 업’ 예비 언론인들은 폭력의 공포에 압도되지 않고 목소리를 더 크게 내겠다는 이들이다. 더 나아가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기 존재와 고통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더 키우고 싶다는 꿈도 가지고 있다. 뉴스타파가 미약하나마 이들의 확성기가 되기로 결심했던 이유다.
2시간가량 진행된 화상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이들이 보내온 영상 리포트와 글 기사를 다시 찾아봤다. 투박하게 편집된 영상 안에는 서안지구의 현실이 꾹꾹 눌러담겨 있었다. 바이라인에 적힌 기자들의 이국적인 이름들도 다시 한번 조용히 불러 봤다. “라샤, 란다, 마야, 사자…” 누군가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른다는 행위에 힘이 있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독자들께도 부탁하고 싶다. 점령당한 땅 팔레스타인에서 '스피크 업' 기자들이 보내온 영상들을 다시 한번 봐주기를, 두려움과 씨름하며 현장에서 분투하는 이들의 바이라인을 기억하고 지켜봐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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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리포트] 다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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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이명주 / 디자인 이도현 / 출판 임승은